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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산가요록][찬자 전순의][산가요록 발굴][온돌][시설농업][동절양채 농법]산가요록 찬자 전순의 생애, 산가요록 발굴 의의, 산가요록 주요내용, 산가요록에 나타난 온돌, 시설농업, 산가요록에 나타난 동절양채 농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산가요록의 찬자 전순의의 생애
1. 전순의(全楯義)의 생몰 연대 고찰
2. 저서(著書)를 통해서 본 전순의(全楯義)

Ⅱ. 산가요록 발굴의 의의

Ⅲ. 산가요록의 주요 내용
1. 농업
2. 조리
1) 술(釀造)
2) 장(沈醬)
3) 김치(沈菜)
4) 식해(食醢)

Ⅳ. 산가요록에 나타난 온돌과 시설농업
1. 온돌 보급과 농업
2. 조선전기 온돌보급의 실태
3. 조선전기의 시비법과 온돌
4. 온돌의 또 다른 활용법

Ⅴ. 산가요록에 나타난 동절양채 농법
1. 동절양채의 기술체계
2. 동절양채 그 시기와 향유자

참고문헌

본문내용

재배법과 온돌이 함께 만나, ‘동절양채’란 하나의 독특한 농법을 창조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사료 A5의 온실을 보더라도 물론 이는 단지 전순의 혼자서 창안한 기술이 아님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조선전기 온실 기술의 핵심은 ‘온돌’을 이용한 ‘지중가온(地中加溫)’과 ‘수증기(水蒸氣)’를 이용한 ‘공중가온(空中加溫)’이란 이중의 가온법(加溫法)을 채택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살창(箭窓)에다 한지를 바른 뒤 기름을 칠해 햇볕이 투과할 수 있는 투명한 창을 만들었다는 점도 중요한 기술 내용이었다. 나아가, 온실 관리도 그 못지않게 철저하여, 특히 혹한(酷寒) 때에는 날개를 창에 덮었을 뿐 아니라 매일 실내에 물을 뿌려주어 온화한 기운이 항상 감돌게 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벽으로 막은(蔽) 삼면과 남쪽 면에 “종이를 발라 기름칠을 한다(塗紙油之)”는 구절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사실 그러한 방법은 불과 50여년전, 비닐이 도입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농촌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기술이었다. 그러나 1515년(正德 乙亥)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경상도 밀양(凝川)에 갔었던 김안노(金安老, 1481~1537)는 그곳 온돌방에 유지(油紙) 장판이 깔려있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었다. 그는 이 “유지 장판이 유리처럼 미끄럽다(且窄油踐滑如琉璃)”며 신기롭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아직 유지의 사용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그 원리가 바로 ‘동절양채’법에서는 겨울철 채소 재배를 위한 반투명창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유지제조 기술도 온돌보급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며, 아마도 이는 아직 민간에는 널리 보급되지 않은 특수한 것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동절양채 그 시기와 향유자
과연 ‘동절양채’ 기술은 15세기에 실제로 사용된 것이었을까? 이 문제를 밝혀내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는 날씨가 매우 추울 때 “유지(油紙)로 만든 살창을 ‘날개(飛介)’로 두텁게 엄창(掩窓)하라”고 지시한 데서 얻어진다. 이를 위해 사용된 ‘날개(飛介)’는 농사직설 비곡종(備穀種)편에서 “薦鄕名飛介”라고 설명되었던 우리 나라 농구였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날개(飛介)의 한자말 이름이 곧 ‘점석(薦)’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농사직설은 ‘날개’를 항아리(瓮)와 목조(槽)에 받은 눈 녹은 물(雪汁)을 저장할 때 그 위를 두텁게 덥는(厚盖) 도구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날개’는 초가지붕을 덮는 ‘이엉’과 같은 것으로써, 짚으로 엮어서 추운 겨울날에 유지로 만든 창을 덮어 보온하는 ‘엄창(掩窓)’의 도구였다. 그런데 ‘날개’는 농사직설 이후에 저술된 그 어느 농서에서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시기의 농서인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만 후술하는 바처럼 ‘점()’이란 농구가 등장하였다. 바로 이 ‘’이 곧 우리말로 ‘날개(飛介)’라 불린 농구였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날개(飛介, 薦, )’를 ‘덮는 도구’로 사용하였던 농서는 농사직설을 위시하여 산가요록과 양화소록 뿐이며, 그 시기는 대체로 15세기 중엽 이전으로 한정된다. 그에 따라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기술은 이 ‘날개’를 살창을 덮는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농사직설과 유사한 시기에 실제로 사용된 것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겠다. 그에 따라 산가요록의 ‘동절양채’ 기술이 적어도 1450년경에 사용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1619년에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난로를 이용해 만든 단순난방 온실보다 약 170년, 그리고 1691년에 영국 J. Enelyn이 처음 개발한 온풍난방 방식의 온실보다는 무려 241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동절양채’법으로 생산된 겨울철 채소의 향유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아마도 이는 감안로와 같은 양반 사대부층보다는 특수 계급, 곧 왕실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한 추정이 가능한 것은 바로 사료 A5의 경우처럼 강화도에다 높이가 10척이 넘는 온실을 지어 귤나무를 재배하려는 구상은 본래부터 민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겨울철에 온실을 지어 채소를 공급하려는 생각도 따지고 보면, 왕실의 수용에 대응하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동절양채’를 위해 당시 중앙관료였던 김안로조차 놀랍게 여기는 유지(油紙)까지 사용하였다는 사실도 그러한 의문을 더욱 확신시키고 있다. 그밖에도 조선국가가 양잠을 위해 온돌을 설치한 데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사료 A6에서는 양잠을 위해 온돌을 만들고 솥(鼎釜)자리(薦席)탄시(炭柴)지지(紙地)등유(燈油) 등을 동원하였는데, 바로 이 재료들이 당시 동절양채에 쓰였던 물건이었다. 결국 그 시대에 이와 같은 도구와 장비를 미음껏 동원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국가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온실은 과연 어느 관청에 의해 건립관리되었을까? 조선초기 채소공급의 임무를 담당하였던 침장고(沈藏庫)는 1417년에 일단 혁파되었다가 1425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다가 1465년에 다시 세조로부터 ‘채소가 극히 거칠고 나쁘다’고 추국(推鞫)을 받은 그 이듬해(1466)에 사포서(司圃署)로 개명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온실은 침장고와 사포서에 의해 관리되었음이 확실하다.
‘동절양채’법으로 재배되었던 봄채소(春採)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춘채(春菜) 가운데서도 ‘열매를 먹는 채소’보다는 ‘일을 먹는 채소’가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따라 산가요록의 채소 중에는 상치(2월 파종)염교(2~3월 파종)아욱(5월초 파종)이, 그리고 사시찬요초에서는 파(2월 춘분 파종)부추(2월 춘분 파종)미나리(2월 춘분 파종) 등이 가능하였다. 그 밖에도 ‘순무’와 ‘무’도 가능하며, 그리고 ‘오이’ 등도 이곳에서 재배하여 결실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참고문헌
김영진 외, 조선시대농업게술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민성기, 농가월령과 16세기의 농법, 부대사학 6, 1982
이호철, 조선전기 농업지대의 분석, 경북대농학지 4, 1986
이호철, 조선전기농업경제사, 한국사회연구총서3, 한길사, 1985
이성우, 한국식경 대전, 향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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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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