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여성인물 조사]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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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경제적인 기반이 없고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몰락양반이 많아지면서 신분질서가 점차 무너져갔다. 서민지주의 등장으로 양반이 된 상민도 있었고, 족보에 이름만 올려 양반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양반의 수가 증가하였고 양반들이 필요로 하는 갓, 망건, 탕건 등의 수요도 자연히 증가하였다. 이런 시기에 김만덕은 양반의 복식에 필수적인 재료를 거의 전적으로 생산하는 제주도에서 활동하였으므로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한편 제주 기녀의 위치도 김만덕이 천한 취급을 받지 않게 하였다. 기녀의 신분은 비록 미천했으나 관리들이 총애하여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였고, 보통 일도 기녀에게 뇌물을 주어야 했다는 제주목사 이익태의 기록이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관원에게 수청을 들고, 지방 향족의 연회에 참가하는 등 지방의 유지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가 많았으므로 인맥을 통해 상업 활동에서 제주도 내외의 교역정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도 김만덕이 의녀로 전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였다. 당시의 왕이었던 정조는 개혁성향의 군주로 채제공,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함께 조선사회의 변화를 주도하였다. 김만덕은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이들에 의해 그 공덕이 후세에 까지 남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정통 성리학을 주장한 노론의 심로숭은 김만덕을 두고 음흉하고 인색하였다고 깎아내렸다. 개혁세력은 김만덕을 인정하고 상업 발달의 모범사례로 들었을 것이다.
김만덕이 큰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흉년을 겪은 제주도 백성들을 살린 데에는 앞서 살펴본 바처럼 검소한 생활과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태도와 함께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봉건적 신분제가 점차 쇠퇴되어 가는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분의 천함을 무릅쓰고 왕과 사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전해져 큰 귀감이 된 것도 김만덕이 의녀로 추앙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나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룩한 성과를 어려운 이들과 나누었던 김만덕은 단순히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대에도 충분히 닮을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자료 출처>
KBS, 한국사전(傳)
세계일보, '제주의녀 김만덕' 나눔정신 되살려 쌀 1만섬 모으기, 09.6.23.
아틀라스한국사
위키백과
이순구, 굶주린 백성을 살린 사업가
한겨레21, 굶어죽지 말아라, 만덕이 있다, 08.08.01.

키워드

김만덕,   만덕,   의녀
  • 가격1,0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9.07.12
  • 저작시기2009.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44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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