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사상사 시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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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혁주의라는 말을 선호함.
167. 메이첸 역시 근본주의라는 말에 대해 좋아하지 않음. 정통주의라는 말을 선호함.
168. 1947년 4월 17일 조선신학교의 51명의 학생들이 그들이 받는 자유주의 교육에 반대하여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 그 핵심은 성경관 특별히 성경의 권위의 문제였음. 1947년 총회는 8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을 조사.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성경관을 확인함. 그는 성경의 무오를 구속을 위한 특별계시라는 관점에서 해석함으로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거부함.
169. 김재준 목사는 제한 무오사상을 가짐. 성경의 무오는 오직 구원의 문제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함. 이는 그가 일본 청산학원에서 유학시 유니온 신학사상을 그대로 받은 것으로 그 배경에는 바르트의 영향이 있음. 1920년대에 바르트 사상은 일본에 영향을 미쳤음. 1949년은 한국에 발트주의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역사적인 해...프린스턴의 죤 맥케이와 에밀 부르너가 한국을 방문.
170. 죤 멕케이가 볼 때 칼 바르트는 구 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밝혀주기 위해 떠오르는 새벽별이었다. 맥케이를 통해 촉진된 바르트주의는 신정통주의자인 에밀 부르너의 방문을 통해 가속화되었다.
171. 한국의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신학교를 근본주의라고 비판한 것은 부르너가 처음이었음. 김재준 교수의 위기신학에 대한 예찬은 보수신학에 대한 담대한 도전이었다.
172. 1948년 제34차 총회는 보수주의 학자들을 증원시켜 자유주의 교수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총회 인준을 받은 조선신학교의 정상화를 위한 극적인 개혁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반대로 부결됨. 결국 1948년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준비. 1949년 35차 총회에서 인준하여 총회신학교를 설립. 장로교 총회 신학교는 박형룡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이 신학교는 구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와 초기 장로교 보수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함.
173.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새로 설립한 장로교 신학교와의 통합안을 통과시켰으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파 간의 대립 때문에 실패. 1950년 제36차 총회에서 조선신학교 측과 장로교신학교 측의 대립이 첨예화 됨. 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방향을 진행. 성경무오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 권징조례 발표.
174. 1952년 제37차 총회는 한국신학대학(김재준 학장)으로 재조직된 조선신학교 문제를 다룸. 김재준 목사 면직을 경기노회에 지시. 조선신학 출신의 출채용건 결정. 스캇 선교사 본국 송환 결정.
175. 1953년 제38차 한국장로교 총회는 보수주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규정할 것을 요청받음. 축자영감설은 성경무오설과 분리될 수 없다는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제시.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한국 교회의 보수주의 신학사상의 이대 기간사상으로 규정.
176. 1차분열은 1952년 10월 경상노회와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은 그들만의 노회를 열었음. 이것을 흔히 고려교단의 첫 총노회 또는 총회라 부름. 전성천 박사는 이 일차분열을 극단적 근본주의자들 또는 맥킨타이어 파당이라 부름. 진보주의자들은 이 분열의 원인을 행정, 정치, 분파적 의협심이라고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교리적 문제였다고 함. 그러나 이 둘 다 엉켜 있었음.
177.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된 순결의 추구는 고려신학교의 설립 뿐 아니라 1952년의 대분열에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이유. 고려파는 교단이 신사참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투쟁을 했고, 이것이 걸림돌 이었음.
178. 2차 분열은 김재준 목사가 속한 경기노회와 목포노회, 한국신학대학임. 총회의 결정이 불법이라고 공격함. 1953년 38차 총회에서 대립은 절정. 1953년 6월 한국신학대학과 김재준 목사 지지자들은 총회 탈퇴, 소위 법통 38차 총회를 개최. 1954년 기독교장로회 라는 이름의 새 교단 형성하고 스스로를 자유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칭함.
179. 1953년 분열의 핵심적 이슈는 교리적임. 이것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성경적 기독교와 인본주의적 기독교 사이의 분열임. 중심 주제는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영감.
180. 김재준은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16세기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던 마틴 루터와 동일시함.
181. 성경의 인간 저자와 신적저자 사이에는 신인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기록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182. 성경의 유기적, 축자적, 완전 영감론이라는 문제에서 초기 선교사들과 박형룡 박사 사이에는 신학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있다.
183. 성경의 무오와 축자영감은 또한 신사참배 문제로 평앙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되고 난 후 그 다음 해인 1940년에 조선신학교가 설립할 때 중심적인 주제들이었다.
184. 성경무오와 축자영감은 초대교회 교부들, 칼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관과 일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대소요리 문답에는 무오라는 말은 성경관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불오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185.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불변의 신념이다. 성경권위는 문제는 한국장로교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성경무오는 그리스도인들이 고수하고 변호해야 하는 최초의 교리일 뿐 아니라 마지막 기독교 교리이다. 이것에 실패하면 조선신학교, 풀러신학교 처럼 된다.
186. 한국 기독교의 약점은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 변호와 이들 교리의 실제적인 적용 사이의 괴리에 있다. 성경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메이천). 또한 한국 교회가 교리적 축소주의로 빠질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닌 개혁주의 전통에서 제한 된 수의 근본적인 교리들만 고수하는 것처럼 보인다(간하배). 또한 한국교회는 개혁주의 전통과 명백하게 일치하지 않는 신앙요소가 있다. 그것은 장로교회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이다. 또한 한국장로교는 근본주의와 역사적 기독교를 구분하는데 실패했다.
187. 성경의 본질을 둘러싼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와의 논쟁은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Dollar)이 아니라 국제적현상(Beale)이다. 성경의 무오성의 범위 문제는 한국장로교의 1953년 대분열을 둘러싼 논쟁을 지배해온 중심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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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19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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