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와 도교 그리고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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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도가와 도교 그리고 문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도가와 도교 그리고 문학
Ⅰ.도가의 사상가
1.열자(列子)
1) 열자의 사적(史蹟)
2) 열자의 사상
2. 그 밖의 사상가
1) 양주(陽朱)
2) 자화자(子華子)
3) 첨하(詹何)

Ⅱ.도가, 도교와 문학
1.노장의 문학사상
2.도교의 문학적 공헌

본문내용

조선 단학파(丹學派)의 개조(開祖)였다. 또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 역시 도교에 조예가 깊었던 문인이었다. 김시습·허균 모두 도교 성향의, 반항적 지식인으로서 소설 장르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앞서의 중국소설 발생론과 상응하여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시가(詩歌)장르에서 가장 도교의 영향을 짙게 받은 것은 유선시(遊仙詩)이다. 유선시는 거의 작자의 불우한 처지에서 오는 감개(感慨)를 환상적인 신선세계에 기탁하여 현실적 제약을 초탈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졌다. 유선시의 단초는 초사(楚辭)의 「원유(遠遊)」에서 이미 보이며, 조식(曹植)의 「승천행(升天行)」등을 거쳐 동진(東晉) 곽박(郭璞)의 「유선시(遊仙詩)」 14 수에 이르러 유선시의 정형(定型)이 이루어졌다. 이 중 조식도 한 때 도교에 심취했던 인물이지만 곽박은 앞서의 갈홍·간보 등과 더불어 당시의 저명한 도교계 문인이었다. 이들은 유폐되거나 피살되는 등 정치적으로 극히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초탈하고자 하는 심리가 작품 속에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유선시의 체재는 이와 같이 도교도나 불우한 처지에 있는 문인들의 심령을 달래기 위해 애용되어졌다. 곽박 이후 유선시가 가장 성황을 이룬 것은 당대(唐代)에 이르러서이다. 당대에 도교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유선시가 대량으로 창작되었는데 이 때는 앞서와 같은 유선시 본래의 취지보다는 주로 연애시의 변형된 형태로서 쓰여졌다.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기층문화로서의 도교의 문학적 수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의 경우 유선시는 조선 중기 당시풍(唐詩風)의 진작과 더불어 유행하여 16, 17세기에 일시적인 흥성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의 유선시는 당 유선시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성립시킨 현실적 토대와 그 표현의식이 달랐다. 조선 유선시의 작가들은 대부분 단학파에 속하는 방외적 인물들이거나 당시의 정쟁에서 실각한 서인계 문인들이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이 그들의 삶의 한 켠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유선시의 의식세계는 불우에 대한 통한과 상란(喪亂)의 아픔을 유선적 환상으로 승화시킨 심령의
대장정이지 단순한 신선놀음의 유유자적한 경지는 아니었다. 허초희(許楚姬)·허균·권필(權 )·정두경(鄭斗卿)·권극중(權克中) 등 대표적 유선시 작가들의 면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추론을 확인시켜 준다.
끝으로 희곡 장르에서도 도교는 한 중요한 양식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원대(元代) 전진교(全眞敎)의 도통(道統) 설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신선도화극(神仙道化劇)이 그것으로 도교 수행의 연행적(演行的) 상관물이라 할 이 양식은 평범한 인간이 도탈(度脫), 득선하는 과정을 통하여 가혹한 몽고 통치하에 신음하는 한족(漢族) 민중의 울분을 카타르시스하는 치유기제의 측면이 있었다. 신선도화극은 명대(明代)에 들어와 그야말로 황실·귀족 계층의 신선놀음·애완품이 되었지만 본래의 창작 취지는 그래도 도교의 기층적 성향에서 비롯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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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19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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