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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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테말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I. 서론

II. 본론
1. 알아둘만한 과테말라의 역사
2. 가볼만한 주요 관광지
* 과테말라시
* 티 갈
* 안티구아
* 아티틀란 호수
* 치치카스테낭고
* 키리구아
3. 과태말라 여행에 필요한 정보
* 출입국
* 교통
* 관광시 주의사항

III. 결론
*자료 출처 및 참고자료

본문내용

다. 마야의 전쟁기록에는 어떤 사람을 얼마나 잡았다는 기록
만 있을 뿐 어떤 도시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은 아무 데도 없다.
마야 문명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잉카와 마찬가지로 쇠붙이를 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복잡한 그림문자를 돌에 조각할 때 돌칼을 썼다. 그뿐이랴. 짐수레가 없었으며,심지어 밭
을 가는 쟁기와 가축도 없었다. 그런데도 맨손으로 돌을 날라 밀림 속에 피라미드를 쌓고 도
시를 건설했으니 노예와 평민의 고통이 어떠했을까.
이집트 문명과 관계
중앙아메리카(아스테카·마야)와 남아메리카(잉카) 대륙에 세워진 피라미드는 혹시 이집트 문명
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세계적인 탐험가 소르 헤위에르달은 잉카 문명과 이집트 문명
이 서로 닮은 점이 많은 까닭을 밝히려고 1970년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던 갈대배를 옛날 방
식으로 만들어 대서양을 건넜다.
고대 이집트와 잉카 사람이 탄 갈대배는 재료와 모양이 같았다. 두 민족은 거대한 신전과 피
라미드를 세워 태양신을 섬겼다. 죽은 사람을 미라로 만들고,뇌를 수술할 줄도 알았다. 왕족
이 집안끼리 혼인하는 풍습도 두 문명이 똑같았다. 헤이에르달은 남아메리카 문명이 이집트
에서 건너왔다는 가설을 세우고,이를 증명하려고 옛 갈대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보인 것이
다. 그러나 아메리카 문명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멕시코와 이집트 피라미드의 유사성
은 겉모습뿐이라고 주장한다. 피라미드를 세운 목적만 보아도 양쪽은 너무 달랐다. 이집트 피
라미드는 파라오의 시신을 둔 방 주변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거대한 ‘무덤’이다. 반면 멕시코
의 피라미드는 밀림 위로 솟은 사원을 지탱하고,그 사원에 위풍당당한 규모와 높이를 제공하
기 위해 지은 계단식 ‘구조물’이다.
기능이 다르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멕시코에 있는 피라미드 가운데 어느 것에
서도 무덤으로 쓰인 자취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가끔 피라미드 내부에서 작은 방이 발견되기
도 했지만,다 비어 있었으므로 무덤으로 쓰였다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49년 멕시코인
고고학자 알베르토 루츠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비어 있지 않은 작은 방을 발견함으로써 ‘기능
차이론’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루츠는 팔렌케에서 사원을 발굴할 때 그냥 언덕처럼 보이
는 곳을 파들어갔다. 한참을 파내고서야 그는 그곳이 8층 피라미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꼭대
기 단 위에 세워진 사원 안에는 계단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마흔다섯 계단을 내려가자
약간 넓은 곳이 나타났다. 스물한 계단을 더 내려가니 벽으로 가로막힌 수평 통로가 나타났다
.장애물을 제거하자 널찍한 장소에 주전자·옥세공품·진주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시신과 함께 넣은 부장품이다!’ 루츠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 물건들은 이집트 피라미드에
서 나온 부장품들과 아주 흡사했다. 그의 짐작은 맞았다. 곧이어 예닐곱 사람의 유골이 나타
났다. ‘순장된 사람들이다!’ 뒤쪽으로 뚫린 방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에 제단으로 보이는 석
조물이 있었다. 석판을 들어내자 안에 50세쯤 된 남자의 유골이 놓여 있었다. 옥 장신구,마야
상형문자가 새겨진 귀고리,왕관,비취 가면,구슬 목걸이,열 손가락마다 끼워진 반지. 거기에 두
개골 양쪽에 놓인 거대한 진주. 루츠는 마야 왕의 시신 앞에 서 있었다.
마야와 이집트의 유사성이 발견된 사례는 또 있다. 1947년 미국의 영화 제작팀이 ‘마야의 역
사’라는 영화를 찍으러 치아파스의 보남파크를 찾았다. 그곳에서 머무르며 영화를 찍는 동안
길레스 힐리는 원주민의 호감을 사서,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채색된 벽화’를 보았다.
신이나 종교적 대상을 그린 종전의 마야 벽화와 달리 채색 물감으로 칠해진 벽화는 고대 마
야인들의 일상 생활을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고학자들에게 그들이 몰랐던 것을 많이 일
깨워 주었다.
어떤 서열에 의해 배치된 것이 분명한 다양한 인물들. 종교적 의미에 따라 결정되었을 다양한
의상,의미를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지만,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 가지
가 눈길을 끌었다. 놀라우리만치 이집트를 연상케 하는 그림의 형식이 그것이었다. 그림에 등
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로로 배치되어 있었고,그들의 머리와 발은 완전한 옆모습으로 표현되
어 있었다. 마야인들이 자기네가 살던 도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데 대
해 학자들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강제 노동에 견디다 못한 평민의 반란,다른 민족
의 침입,천재지변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도시에는 전쟁이나 천재
지변이 일어난 흔적이 없으며,마야를 정복할 만한 민족도 주변에 없었다.
마야 문명의 멸망
마야인들이 자기네가 살던 도시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데 대해 학자들
은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강제 노동에 견디다 못한 평민의 반란,다른 민족의 침입,천
재지변 등등. 그러나 그것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도시에는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
어난 흔적이 없으며,마야를 정복할 만한 민족도 주변에 없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말은,미국인 실바너스 모를리가 주장한 대로 화전(火田) 탓이 아닐까. 마야
인들은 끝을 뾰족하게 한 막대기로 땅을 내리찍어 구멍을 낸 다음 거기에 옥수수씨를 몇 알
씩 뿌려 농사를 짓는다. 오늘날의 마야인들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 땅을 불태워 농사를 지으
면,그 땅의 지력이 되살아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도시 주변의 밀림을 모두 일궈 먹은
마야인들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들은
화전을 일구려고 밀림에 터를 잡았고,그 때문에 밀림 속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그러나
이 주장도 1972년 계단식 논의 자취가 발견되고,낮은 늪지대에서 흙을 돋워 농토를 만든 증
거가 몇 군데에서 드러남으로써 절대적인 설득력을 잃었다).
오늘날 마야의 문자와 유적은 80%쯤 밝혀졌다고 한다. 밀림과 땅속에 숨어 있는 이 문명의
신비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는 날 우리는 얼마나 더 놀라게 될까? 이집트나 로마 문명에 대해
아는 것만큼 마야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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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5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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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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