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의 아리랑과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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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산의 아리랑과 김구의 백범일지를 읽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김구(金九)
2.1 생애
2.2 운동활동과 사상적 배경
2.3 역사적 의의, 한계

3. 김산(金山)
3.1 생애
3.2 운동활동과 사상적 배경
3.3 역사적 의의, 한계

4. 무엇이 그들의 차이를 만들었는가?
4.1 같은 사건, 다른 반응.
4.2 김구와 김산의 보편성

5. 결론

본문내용

자극을 주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새로이 증명해 주었다. 개인적인 테러리즘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중략...
1927년 이후 가장 눈길을 끄는 조선인의 테러행위가 1932년 봄의 항일전 직후에 상해 흥구공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것은 자연발생적인 개인적 행동이었다. (아리랑, p. 105)"
무정부주의가 공산주의로 성숙한 단계에서는 테러활동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김산은 윤봉길의 의거도 '개인적 행동'이라고 축소해서 이해하고 있다.
김구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테러리즘은 존속의 위기에 처한 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의 '명분'을 대외에 알리려는 치열한 선전전(宣傳戰)이었다. 하지만 김구 역시도 테러리즘은 배수진으로서만 활용하고
"특무공작으로 천황을 죽이면 천황이 또 있고, 대장을 죽이면 대장이 또 있지 않은가? 장래 독립하려면 무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는가? (백범일지, p. 309)"
라고 말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의 단계로 진입한다.
4.2 김구와 김산의 보편성
(1) 인도주의
김구의 경우에는 동학운동과 옥살이를 경험하며, 김산은 기독교와 톨스토이주의의 영향으로 인도주의가 몸에 베게 된다.
"후일 우리나라를 독립시킨 뒤 감옥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으로 충당하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일원으로 보아 선으로 지도하는데 주력해야 하겠고, 일반사회에서도 입감자라고 멸시하지 말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야 그만한 가치가 생기겠다고 생각되었다. (백범일지, p. 221)"
이 밖에도 한인애국단원들, 광복군 생도들을 독려하는 장면이나 <나의 소원>에서도 김구의 민족에 대한 '인도주의'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김산은 스스로가 '잔인한 것을 싫어했으며', '인도주의의 위대한 역사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잔혹성을 진리의 한 측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여 그의 혁명적 정치노선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사람의 목숨은 귀하나, '혁명'이라는 목표 아래서는 다소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가치에 상반되지 않는 한 최대한 인도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아리랑>의 곳곳에서도 이러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은 기본적으로 저항운동이고, 일제를 악(惡)으로 보아 이를 배격하고자 한다. 이러한 운동이 자칫하면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부르고, 잔인함은 잔인함으로 귀결된다'는 말처럼, 특정/불특정 집단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으로 변질될 수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예로 마피아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김구나 김산이 지녔던 인도주의는 이러한 변질을 막아 본래의 노선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지도자의 필수적인 속성이라 하겠다.
(2) 민족통일노선
김구와 김산이 말년에 공통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바로 '민족통일노선'의 구축이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이후 김구가 가장 힘쓴 일이 바로 민족주의 정당과 김약산의 공산당 등과 연합하여 통일회의를 계획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미국, 하와이의 민족운동가들의
"통일은 찬성하나 김약산은 공산주의자이니, 선생이 공산당과 합작하여 통일하는 날은 우리 미국교포와는 입장상 인연과 관계가 끊어지는 줄 아시오. (백범일지, p. 325)"
라는 회답을 받았고, "주의가 같지 않은 단체와는 단일조직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단체들을 수없이 설득하기에 나선다. 하지만 결국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지막에 김약산의 민족혁명당 마저도 이 회의를 탈퇴함에 따라 통일회의는 깨지고 말았다. 대신 3당 통일회의를 속개하여 미국, 하와이 단체들에게 사과하고 한국독립당을 창설한다.
김산도 체포되어 생을 마감하기 전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일이 '조선민족연합전선' 구축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2.2 (5) 에서 다루었으므로 생략한다. 공산주의자 안에서도 김산과 같은 이러한 통일전선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에, 김약산의 공산당과 임시정부가 일시적으로나마 합작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5. 결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김구와 김산은 각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다른 이념으로 '민족해방'을 이루고자 하였다.
왜 그들이 이렇게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를 요약하면, 일단 그들의 성장 배경이 달랐고,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주요 사건들을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구는 모든 운동이 '민족'을 대상으로 '민족'이 주체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보는 '명분'과 '정통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 반면 김산은 이 같은 개념이 희박하여 항일 투쟁의 주체가 꼭 '한민족' 혼자일 필요는 없으며, '민중 혁명'이라는 공통분모를 두어 '중국 공산당'이라는 거대한 집단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도 운동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상대의 노선과 함께 일제에 대항할 필요성을 느껴 통일전선 구축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각자의 노선이 지닌 한계에 부딪치고, 민족운동가들간의 노선이 조율되기 전에 전쟁이 끝남으로써 우리 민족은 타의에 의한 해방을 맞고, 민주주의/공산주의 이념대립을 해결하지 못한 채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이 되었다. 김구, 김산 같은 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 운동단체가 단일노선을 채택하여 역량을 모으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끝으로 느낀 점이 있다. 그동안 중, 고등학교에서 배워온 항일 독립운동사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반공교육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는 식민사관에서 덜 벗어난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식민지와 분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주신 고동환 교수님께 감사 드린다.
참고문헌
김구, 우현민 현대어역, <백범일지>, 서문당. 1994.
님 웨일즈, 김산, 조우화 옮김, <아리랑>, 동녘. 1984.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 역사비평사. 1992.
두산세계대백과
http://encyber.com
김산 그리고 아리랑
http://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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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3
  • 저작시기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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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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