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과 평창 자료집
본 자료는 9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해당 자료는 9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9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오대산과 평창 자료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오대산
양떼목장 2
월정사 8
상원사 19

본문내용

보물 제793호로 지정돼 있다. 세조 어의를 비롯한 각종 복장 유물은 청량선원내의 유리 보호각 안에 진열돼 있다.
상원사
중창권선문
세조 10년(1464)에 그가 상원사를 중창하기 위해 슨 친필 어첩 두 권을 말한다. 한 권에는 상원사를 중창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는데, 한문과 함께 훈민정음체로 된 한글 번역문이 실려 있다. 다른 한 권에는 세조와 의숙공주의 친필 및 옥새인이 남아 있고, 효령대군과 정인지, 한명회 등 여러 대신들의 친필도 있다.
한글로 된 기록 중 활자본이 아닌 먹과 붓으로 쓴 기록으로서 가장 오래 된 문서이며, 초기 한글 서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왕가에서 직접 사찰에 보낸 중요 문서이기도 하다. 보물 제140호로 지정돼 있으며 월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인물탐구 ; 방한암스님]
상원사를 지켜내신 방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되던 해 금강산 여행에서 깊은 종교적 감명을 느끼고 입산하였다고 한다.
경허스님의 제자로 깨달음을 얻었으며 1925년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 조선총독부에서 협조를 요청하자 “차라리 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익히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에 은둔, 입적하실 때까지 27년간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렇듯 이 땅의 뛰어난 선사였던 방한암스님이 야마가와 주켄(山川重遠)이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을 하였던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1년 총독부가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설립을 공식 인가한 뒤 방한암스님이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였는데, 『신불교』제31집에 사진과 함께 그 이름이 대외적으로 공포된 것이다. 27년 동안이나 동구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던 그가 직접 창씨 개명을 했다던가 또는 친일성의 글을 발표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비록 그것이 휘하의 인물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라 할지라도 그 오명을 지울 수는 없게 되었다.
14후퇴 때에도 피난가지 않고 끝까지 절을 지켰는데 마지막 가는 길 또한 장엄하였다. 모두가 떠난 텅 빈 절간에서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든 모습으로 입적하였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박 모라는 종군기자에 의해 그 모습이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도 오대산 스님들에게는 마지막 가시던 선사의 모습이 선방의 죽비소리 같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다.
[전설 ; 상원사에 얽힌 세조 일화]
세조, 문수보살을 친견하다
세조는 영험하기로 이름난 상원사에 기도를 드리고자 오대산을 찾아와 먼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향했다. 도중에 더위를 식히고자 신하들을 물리치고 청량한 계곡물에 몸을 담갔다. 그때 마침 동자승이 지나가기에 등을 씻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시원스레 등을 씻는 동자승에게 세조는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하였다. 그러자 동자는 한술 더 떠서 “대왕도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하고서 홀연히 사라졌다.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은 세조가 몸을 살피자 종기가 씻은 듯 나았다.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
상원사 법당 앞에 있는 고양이 석상은 조선 세조 임금과 관련 있다. 하루는 세조가 기도하러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 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괴이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을 찾아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했다. 그래서 예로부터 상원사를 중심으로 사방 팔십 리 땅이 모두 상원사 땅이었다.
적멸(寂滅)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자리인 고요의 상태로 돌아감을 이른다. 법신인 부처의 세계에서 육신으로 인한 마지막 장애까지 훌훌 털어 버리고 영원한 진리 그 자체로 돌아가면 곧 적멸인 것이다. 적멸보궁이란 그 깨달음의 성인인 부처의 뼈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이다. 우리 나라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는데 영축산의 통도사, 설악산의 봉정암, 사자산의 법흥사, 태백산의 정암사, 그리고 오대산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이 바로 그곳이다. 그 중에서도 오대산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이마에서 나온 정골(頂骨)사리가 모셔진 곳으로 제아무리 백치라도 이곳에 이르면 지혜를 만나고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일지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신령스러운 땅이다.
먼저 이곳에 오르면 웅장한 오대산의 산세가 첩첩으로 에워싸고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고 산의 향기에 휩싸여 있는 듯하다. 땅의 기운을 보고 기도 처의 들보를 올렸던 옛 사람들의 안목이 다시금 새롭고, 천 년 전 이 땅을 발견하고 머리 조아렸을 선각자의 탄성소리가 들릴 듯 하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구름 속을 나는 용의 머리 위에서 선정(禪定)에 든 모습처럼 고요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다. 그리고 보궁의 법당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고 불단(佛壇)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다. 통도사의 경우처럼 금강계단과 사리탑이 장중하게 세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뒤뜰에 석탑을 모각한 작은 판석만이 소슬하게 서 있다. 성스럽게 봉안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 혹자는 불사리가 봉안되지 않았다는 의심도 하지만 어느 위치에 불사리를 모셨는지 증거하지도 않고 다만 국토의 가장 성스러운 이 산자락 어느 곳엔가 부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상징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오대산 적멸보궁의 큰 뜻이고 옛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인 것이다.
사고(史庫)란 고려시대부터 병화와 재난으로부터 역사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심산유곡에 지어놓은 건물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사고가 불타 없어지자 선조 39년에 전주 사고본을 기본으로 4부를 더 제작하여 1부는 춘추관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삼재가 들지 않는다는 오대산, 태백산, 마니산, 묘향산의 명당에 보존하였다. 이때부터 영감사는 사고를 돌보는 사찰이라 하여 사고사(史庫寺)로 불리게 되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한일합방 후 일제가 동경제대로 강탈해 갔는데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영감사와 함께 퇴락 했던 오대산 사고는 6.25 때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는데 최근 2층 누락의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키워드

  • 가격3,0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1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793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