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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선비의 특성

Ⅲ. 선비의 도덕성

Ⅳ. 선비의 정신

Ⅴ. 선비의 교훈

Ⅵ. 대표적인 선비

Ⅶ. 결론 및 시사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세 제민(經世濟民)의 경륜을 실천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태평하게 함이 학자의 급선무라고 믿었던 것이다.
율곡은 고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몸차림이 간소하고 처신이 겸손하였다. 그는 언행의 표리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유리알처럼 투명한 마음가짐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도 율곡은 참을성 있게 그들을 대했으며, 밤이 깊어서 저녁 식사가 늦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위정자는 민심의 동향을 파악해야 하고 민심의 동향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이 율곡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율곡에게는 가난한 친척이 많았다. 친척들의 궁핍을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 당시의 인심이었으며, 율곡은 가난한 친척들을 성심껏 돌보았다. 그리하여 집에 양식이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재녕(載寧) 군수인 친구 최립(崔)이 율곡에게 쌀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군수가 보낸 쌀은 최립 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가의 물건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관 대작의 자리를 두루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에는 아무 재산도 거의 없었다. 수의(壽衣)의 준비조차 없어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것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 당시가 탐관오리들이 세도를 부리며 재물을 긁어모았던 부패의 시대였음을 생각할 때, 율곡의 청렴결백이 성현의 경지에 가까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앞뒤가 꽉 막힌 골샌님은 결코 아니었다. 천성이 활달하게 트인 그는 정감이 풍부하고 풍류도 아는 멋있는 선비였다. 그가 멋있는 남자였음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시인이기도 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득남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을 때, 곱게 단장한 기생들도 불렀다. 근엄하고 강직한 성품의 우계(宇溪) 성혼(成渾)이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닌가?”하고 정철에게 물었다. 이 때 옆에 있던 율곡이 웃으며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음이 또한 도(道)라” 하고 대신 대답하였다. 이 멋있는 한마디에 성혼도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율곡이 풍류를 알면서도 끝내 검은 물에 검어지지 않은 선비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유지(柳枝)에 관한 일화가 있다. 유지는 본래 양반의 가정에 태어났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기생이 된 여자였다. 재색을 겸비한 유지는 율곡을 깊이 사모하였고, 율곡도 유지를 귀엽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로서의 몸가짐을 허물어뜨린 적은 없었다. 유지로서는 율곡의 그러한 태도에 아쉬움을 느꼈고, 어느 날 전송을 하고 돌아가다 말고 발길을 돌려서 밤중에 율곡의 숙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의 당혹스러운 심정을 율곡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을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다.
황희와 조광조 그리고 이황과 이이는 각각 개성(個性)을 달리하는 선비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수신(修身)과 제가(濟家) 그리고 치국(治國) 등 인륜(人倫)의 문제로부터 출발했으며 주로 유학의 경전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 그들은 기회가 적절하면 관직에 나아가서 국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이 학자의 도리라고 믿었다. 그런 뜻에서 그들은 모두 정통적 유학지사(儒學之士)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조의 선비들 가운데는 그들과 색채가 다른 사람도 간혹 있었다. 그 한 예로서 우리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Ⅶ. 결론 및 시사점
선비란 전시대적 성격이 짙기는 했으나 한편 오늘의 시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미점(좋은 점)이 없지도 않다. 비민중적이며 세속에 어둡고 공리 공론(公理空論-헛된 생각이나 이론)을 일삼는 관념적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때로 그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용기를 대의를 위해 발휘하기도 했다. 직언(直言-거리낌 없이 바로 하는 말)을 하면 왕의 노여움을 사 목이 달아나는 것이 뻔한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태연히 간언(諫言-간 하는 말)을 서슴지 않기도 했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관군(官軍)이 무색하게 의병을 일으켜 외적과 싸우는 등 충의를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선 서거정의 말대로 \"벼락이 떨어지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슴지 않는\" 대쪽 같은 절개를 보이기도 했다.
\'사색 당쟁(四色黨爭)\'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옛 선비에 변절이란 도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손자대까지 그들은 일편단심 변할 줄을 몰랐다. 매천(梅泉)같이 초야(草野-시골의 궁벽한 땅)의 일개 무명 선비조차 망국(亡國)을 보다 못해 순국(殉國-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을 했다. 선비로서 의병 대장 또는 순국 열사로 길이 청사(역사)에 빛날 인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오늘날 선비 예찬론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의 그 굳은 지조, 순국의 애국 사상, 안빈 도락(安貧道樂)하는 생활 태도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긍정적 면에서 선비의 좋은 점을 오늘의 시대에 되살려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현대가 요구하는 선비는 대중을 무시하는 고고형(孤高型-혼자 세속에 초연하여 고상한 모양)이 아니라 대중 속에서 같이 호흡하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선비는 공리공론을 일삼는 관념형 인간이 아니라, 현실 의식에 투철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하려는 이념형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 사회가 기사 정신을, 일본이 무사도를 근대 속에서 새롭게 그 정신을 계승했듯이, 우리도 선비 정신을 오늘의 시민 사회 속에서 새롭게 되살리는 자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참고문헌
- 권분봉, 전통적 선비정신에 대한 일고찰, 광대학교, 2003
- 금장태, 한국의 선비와 선비정신,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종호 외, 안동의 선비문화, 서울 : 아세아 문화사, 1997
-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 선비, 현암사, 2002
- 정옥자·금장태·이광표 외,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효형 출판, 1998
- 허권수,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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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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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65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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