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사에 관하여-새로운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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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①삼국사기가 고구려중심인게 가장 큰 문제이다.

②말갈은 우리 민족을 중국 측에서 싸잡아 폄하한 말이다.

③만주의 서안평이란 지명을 고구려가 지은 지명이다.

④평양의 위치를 가늠하는 패수란 어디일까?

본문내용

고구려는 수많은 전쟁중에 수군을 이용한 적은 백제와 싸울때와 몇몇 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광개토황제가 수군을 이용하여 백제를 친 것은 수군을 통하는 것이 백제 공략에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의 백제를 치기 위해서는 바닷길을 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빠른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한반도내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말하자면 고구려의 수도가 대동강변의 평양이었다면 굳이 위험부담이 높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백제를 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 대륙평양이 수도인가는 머리속에 지도를 그려보면 된다. 예전 싸움시, 병신대원정같은 국가적인 큰싸움은 수도에서 출정식을 한다. 그리고 적지로 출발하는데 대동강 평양에서 출정식을 마쳤다면 수군을 동원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대륙 평양이기에 발해만 위쪽 수군으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돌아서 오는것과 수로로 오는것은 총5배 가까이 거리 차이가 난다.
이렇듯 해로를 이용하여 대원정에 나선 광개토황제는 대승을 거둔다. 이 싸움으로 고구려는 아리수(한강)북쪽 백제 땅을 모두 차지하며 58개성과 700개촌을 얻는다. 또한 아리수를 건너 백제 도성으로 진군하여 백제왕의 항복과 노객이 되겠다는 서약을 받고나서야 고구려는 철수한다.(왕족과 신하 10명, 평민 1,000명 포로) 이 전쟁이후 백제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후로도 한강 이북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때 바로 백제로부터 빼앗은 아리수 북쪽에 지방수도 아래평양을 건설한다. 이는 광개토황제 능비 영락태왕 9년 기해년조에 " 백잔(백제:고구려가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하였다. 황제는 下평양을 순시하였다"는 기사에서 확인된다.(원문 "百殘違誓 餘倭和通 王巡下平穰") 많은 학자들이 이 기사의 "왕순하평양'이란 문장를 두고 '왕이 (아래로) 평양을 순시했다'고 해석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번역이 성립하려면 '왕하순평양' 또는 '왕순평양'이라고 고쳐져야 한다. 때문에 "왕순하평양(王巡下平穰)'이라는 문장에서 '하평양(下平穰)'은 하나의 단어 즉, 명사이며,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왕이 하평양을 순시했다가 옳다. 역시 대륙평양을 나타내는 중요한 증거중 하나인 것이다. 원래 '순(巡)'의 개념은 돌아본다는 뜻이다. 광개토황제가 '하평양'을 둘러봤다는 것은 새로얻은 영토에 세운 부수도를 둘러본다는 것이다. 자신이 기거하는 도성을 볼 때쓰는 용어가 아니란 뜻이다. 이러한 사례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통령의 외국순방, 지방순시 등 다 같은 순(巡)자를 쓴다. 전쟁에서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면 일정시간이 지난 후 안정성이 확보된 후 둘러보는 순(巡)이 2000여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하평양을 '남평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당시의 방위개념에서 하(下)는 남쪽, 상(上)은 북쪽을 의미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상(上)은 반드시 북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머무는 도성도 가리켰고, 하(下)역시 남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머무는 도성 이외의 모든 곳을 가리켰다. 이 의미는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온다고 하는데 방향은 서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평양을 무조건 남평양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평양은 말 그대로 '아래평양'을 의미하며, 이는 곧 수도인 평양에 대비되는 '명칭'이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하평양은 '작은수도'정도로 이해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광개토황제는 백제로부터 빼앗은 아리수 이북의 영토에 작은 수도인 하평양을 건설하여 한반도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다. 광개토황제는 같은 민족의 땅인 한반도로 진출하며 중요성을 인식하여 부수도 격인 '하평양'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건설된 하평양에 대해 학계 일부에서는 한강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식민사학자은 여전히 고조선의 평양을 대동강 평양으로 믿고 있어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데 당시 한강 근처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부근이며, 따라서 안정성이 확보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수도격인 '하평양'을 한강변에 설치하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백제와의 접경에서 먼 대동강에 하평양을 건설하는 것이 맞는 이치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학계 일부에서 주장하는 고조선, 고구려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대동강변의 평양은 광개토황제가 백제와의 싸움에서 획득한 영토에 세운 부수도격인 하평양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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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24
  • 저작시기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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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79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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