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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건축가][보타][산치오][팔라디오][토로야][파가노][배병길][김수근]건축가 마리오 보타, 건축가 라파엘로 산치오,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건축가 토로야, 건축가 주세페 파가노, 건축가 배병길, 김수근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건축가 마리오 보타

Ⅱ. 건축가 라파엘로 산치오
1. 이탈리아 성기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이자 건축가
2. 우르비노에서 보낸 어린시절
3. 페루자에서 페루지노에게 배운 도제 시절
4. 피렌체 시절

Ⅲ.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

Ⅳ. 건축가 토로야

Ⅴ. 건축가 주세페 파가노

Ⅵ. 건축가 배병길

Ⅶ. 건축가 김수근

참고문헌

본문내용

확대 수용해 가는 암시적 몇몇 작품이 돋보이고 있다. 공릉사옥(85) 및 국민은행 전산본부(81), 법원청사(85), 뉴 자이안트 호텔(85)등 일연의 대규모 건축계획 속에서 70년대의 두터운 어휘를 깨는 새로운 기법들이 엿보이고 있다.
이밖에 무수한 작품활동에 대한 문화적 가치는 작품에 대한 재인식의 기회와 함께 다시 한 번 강조될 것으로 믿어진다.
또한 이 같은 왕성한 활동에의 흐름이 비단 건축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80년대 초에 이르러 범위 없는 미적 안목으로서의 시야를 형성하며, 건축의 문화적 가치상승의 범위를 넓히려는 소중한 Master Plan을 펼치게 된다. 바로 「 공릉예술Academy 」에 대한 구상이 그것이다. 건축수련의 장임과 동시에 문화적 전통이 숨쉴 수 있는 마당의 유입과 창작에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그분의 후반기의 계획을 현실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분의 가늠할 수 없는 뜻의 행진이 영면의 땅속으로 함께 사라져 갈 수 없듯이, 좋은 환경을 향한 의미 있는 행위에의 열정이 결국은 더 좋은 환경을 위해 보다 짙은 거름이 되어지는, 이 같은 행위의 교훈적 모습이 진실의 폭을 넓혀갈 때 이 땅의 건축적 토양은 더욱 윤택해 질 것이고, 더불어 자란 수목의 꽃가루와 열매의 향기는 더욱 짙어져갈 것이라 믿는다.
1960년 김수근 교수가 우리나라에 되돌아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같은 해 국회의사당 건축현상설계 1등 당선이었다. 그 자신 이미 일본에서의 수학과 훈련을 마치고 귀국의 동기를 찾고 있었으며, 이 당선은 개연적인 귀국조건이 되었으며 그 후 그의 우리 나라 건축계에서의 위치조차도 가늠케 하는 것이었다.
그가 귀국하게 되는 이 60년대의 우리나라건축은 대체로 모더니즘을 경험하여 내고 난 뒤, 새로운 구미건축의 동향에 대해 눈을 드리기 시작한 경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그때까지의 건축적 성과란 시민회관, 신신백화점(53년), 국제극장(57년), 대한극장(57년), 서강대 본관(58년), YMCA(60년), 한국은행 외국부(60년) 등의 합리주의 건축의 범주와 김중업씨의 주한 프랑스대사관(60)등 그가 르꼬르뷔제의 영향을 벗으며 한국적 표현에 몰두하던 시기이다. 이른바 제삼세대의 건축이념과 지역적 관심을 중심으로 기계적 기능주의 다음의 새로운 합의점을 두루 찾고 있던 시기이었다.
다시 말해 김수근 교수가 돌아오게 되는 우리 나라의 여건은 국회의사당의 설계가 아니더라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충분한 활동의 범위가 보장되어 있는 것과 같으며, 국내 건축계로서도 어떠하건 새로운 전개를 마련하여야 할 기미가 완숙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그의 현상 당선안인 국회의사당이 구현되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작가를 이해하여 가는데 있어서 경향계보로 분류하며 고찰하는 형식은 시간적 맥락 중에 推移와 그 動機를 분명히 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김수근 교수의 작품계보에서 역시 그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적 스케일 속에 작품개념의 변모가 작업에 나타나는 양상을 중심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를 뒷받침하고 있던 조직의 성향은 그와 공간그룹이라는 총체성을 보다 가깝게 이해하는 중요한 인자가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보다 직접적인 관심은 공간과 스케일을 중심으로 한 전통해를 찾고 있었으며 이의 표현이 1971년부터 원서동 공간사옥에서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공간의 의도된 위계를 통해 트임과 막힘, 스케일의 제어와 확대, 그리고 연속적으로 풀리는 마디의 뚜렷한 인지로서 건축적 품격의 표현이었다. 같은 해 범태평양건축상을 수상하여 연설하게 된 窮極的 空間이라는 명제는 그의 공간적 이해를 전통에서 어떻게 찾고 있는가의 직접적인 메시지로 기억된다.
60년대의 자기표출적 건축이 70년대 원서동 공간시기부터는 內密의 경지로 돌아왔다. 이는 끊임없이 안으로 관조하는 사고과정에서 그의 공간세계는 침착하게 되고, 디테일이 예리하게 되며, 표현은 순화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동안의 그의 사고과정을 좀더 직접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1980년 일본동경에서의 UIA아시아 호주지역 회의에서 연설한 Negativism을 되돌려 볼 필요가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71년 범태평양건축상 수상 연설에서의 궁극적 공간이라는 의미를 다시 환기시키며 시작하고 있었다.
환경의 책임있는 조정자로서 그리고 진실로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킬 건축이 궁극적 목표일 때, 그의 방법은 윌 전통에서 경험된 사색과 영감을 통해 터득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정신적 삶을 위한 필수요건으로 좀더 인간생활을 완전하게, 좀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 속에서 저는 중요한 것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즉 공간설계를 인간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지속되어 내려온 한국인의 고정관념입니다. 그런데 최근 10년 동안에는 그 이전의 생각에 대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무한정된 요구를 충족시키며 그와 함께 지구상의 모든 것 이 인간화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요, 다시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고양시키기 위해 해야 할 것 뿐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가르쳐 줍니다.”
그는 이것을 부정론이라고 하여 원초적으로 동양정신과 서구의 합리적 공리주의의 한계를 비교하면서 건축에서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었다. 첫째 주공간의 제한, 둘째 공간이용의 논리성, 셋째 설계의 역할이라는 법을 첫째자연과의 혼화, 둘째 빈터의 생명을 아낌, 셋째 이상과 창조를 위해 모호하게 남길 여유라는 「術」.
모태적 공간이란 이 표현과정에서 결말로 내보인 뜻이지만, 그가 원서동 공간에 이르기까지 전원과 자연에 대한 어떤 터득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김성곤, 서양 건축사, 기문당, 1996
배대승, 서양건축사, 현대건축사, 1999
이상호·김수정·진수영·최우연, 논문 - 마리오보타의 교보타워에서 구현된 건축개념과 공간조작 방법 연구
윤장섭, 한국건축사, 동명사, 1973
윤전근 외 7명, 서양건축사, 기문당, 2003
Le Corbusier, 장성수 역,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태림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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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0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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