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륙진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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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대륙진출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머리말

2.백제요서경략에 대한 부정적 입장
1)대세론에 입각한 부정적 입장
2)사료적 측면에서 본 부정적 입장

3.백제 요서경략에 대한 긍정적 입장
1)사료의 신빙성
2)백제의 항해술 문제
3)백제의 요서진출 시점

4.맺음말

본문내용

통의 종족 丁零이 모용수의 후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모용씨 세력은 몇몇 거점 지역을 장악한 것 이외에는 과거 前燕 시기처럼 안정적인 지배를 확보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전진-후연 교체기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요동 진출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의 요동 점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화북의 동쪽을 거의 평정한 모용수의 후연이 385년 11월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그 땅을 회복한 것이다. 그래서 불과 반년 정도에 걸친 짧은 기간 동안 고구려는 요동 점령을 실현하였고, 완전한 장악은 다음 시기로 미루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385년에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점거했던 것은 분명하고, 이것이 곧 송서 등에 백제의 요서 진출 직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는 고구려의 요동 점거를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리고 385년은 양직공도에서 ‘晉末’이라고 표현한 시점과도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3의 ‘阿道基羅’조에 보면, “梁唐二僧傳 及三國本史皆載 麗濟二國佛敎之始 在晉末大元之間”이라는 구절이 있다. 太元은 東晉 孝武帝의 연호로 376년부터 395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이 시기가 ‘晉末’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곧 385년을 양직공도에서 말한 ‘晉末’로 보는 것이 큰 무리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백제의 요서 진출이 일어난 시점 역시 385년 무렵으로 볼 수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요동 점령이 실현된 385년 6월 직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났을 것이다.
Ⅳ. 맺음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긍정적 입장에서 지지하는 요서진출 시기에 의하면 항해술의 문제라던가 백제의 국내외 상황이 요서 진출을 시도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또, 우리 측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요서 진출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 정작 요서지방과 가까운 『北史측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들이 부정론 입장들의 근거가 되어 주고 있다.
반면 긍정론 입장에선 5세기 대에 편찬된 송서로부터 6세기대의 양직공도, 7세기대의 양서 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적이 있음을 거론하고 있다.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물론 송서의 기록이 가장 앞서지만, 이후의 다른 역사 기록에서도 관련 사실이 꼬박꼬박 기재되고 있음을 감안하다면, 백제가 한때 요서 지역에 진출한 사건은 중국 남조에게 있어서는 각인될 만 한 사건이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렇게 송서』와 『양직공도』의 사료를 적극 신뢰하는 입장에서 요서경략 시기에 대하여 晉末이라는 시기적인 일치가 보이고 있어 백제의 요서 진출을 385년 무렵으로 보고 일시적이나마 점거했다고 보고 있다. 해양학적인 입장에서도 오히려 백제가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점이나 요동과 요서 지방에는 북방 유목 종족들의 나라들 가운데 일부는 발해만과 황해 북부를 활용하여 군사작전과 외교정책을 폈으며 교역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항해술의 문제로 요서진출이 불가능했다는 부정론의 입장으론 타당하지 않음을 밝힌 바 있다.
여전히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있지만,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가 알던 백제사가 새로 쓰여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최근엔 백제가 고대한일관계사로서 주목을 받았고 무령왕릉이 발견으로 백제라는 국가가 굉장한 문화를 소유한 국가였으며 일본에서도 백제의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 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사 백제가 중국대륙까지 진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신라사에 비해 약간 쳐져있던 백제사는 찬란한 문화를 영유했을 뿐 아니라 중국 대륙까지 경유할 정도의 국력을 지녔다고 여겨질 것이며, 군·현제라는 제도가 백제에도 존재했음을 새롭게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백제의 요서경략을 긍정할 만한 확실한 근거도 없으며, 또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들이 그렇게 부정할 정도로 신뢰성이 떨어지는 사료들도 아니기 때문에 백제의 요서진출이 있었던 것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송서』의 내용을 보아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지며, 백제의 요서진출은 해양학적 입장에서 해상교역을 위해 어떤 군, 현단위에 교역소를 설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백제가 해상활동을 통해 樂浪僑郡과 활발히 교류하며 연계를 남조 측에 과시하여 전달한 것에서 ‘진평군 진평현’ , ‘백제군’ 등의 지명이 남조 측 역사책에 기록된 것 같다. 또, 『양직공도』의 ‘낙랑’이란 용어도 단순히 기록한 사람의 실수라고 보긴 어렵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상 교역의 중심에 樂浪僑郡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백제와 혼용해서 쓴 것으로 보인다.
즉,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던 것은 漢이 한반도에 한사군을 두었던 것과 같은 식민지 단위의 군을 둔 것이 아니라 해상교역을 보다 원활히 하기위한 해상교역소를 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구려 입장에서나 그 밖의 문제가 제기되었던 유목민족들도 교역에 대해선 굳이 간섭하거나 제제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김에 군사적인 무력으로 점유한 것이 아니라 교역으로서 385년 무렵 일시적으로나마 요서 진평현을 점유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대외관계와 문물교류, 『한성백제사 4』,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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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규, 百濟의 遼西進出說 再檢討 :4세기 후반 扶餘系 人物의 동향과 관련하여, 『진단학보 91』, 2001.
강종훈,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한국고대사연구 제30집』, 2003.
윤명철,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사계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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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재, 백제의 요서영유,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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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2.01
  • 저작시기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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