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한국인 프로야구 선수 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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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문
- 장훈선수의 생애
-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활동
- 재일한국인으로서의 장훈

3. 결론

4. 참고 자료

본문내용

3타수 3안타를 치면 1모 차로 역전될 형세였다. 3타수 3안타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지만 막판에 안타를 몰아치면서 맹추격을 벌이고 있는 야자와의 기세로 미루어 일말의 불안이 없지도 않았다. 주니치의 다음 경기는 시즌 최종경기로 히로시마 구장의 대 히로시마 전이었다. 히로시마의 재일동포 투수 가네시로 모도야스(金基泰)는 마치 '쳐 주십시오' 하듯이 야자와에게 스피드를 죽인 직구를 한가운데로만 던지고 내야수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지 않는 따위의 낯 뜨거운 더티 플레이로 기어이 3안타를 만들어 주어 수위타자 타이틀은 야자와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문제의 그 타구가 안타로 처리됐더라면 야자와는 남은 한 경기에서 5타수 5안 타를 쳐야 하는 절망이나 다름없는 궁지에 몰리게 돼 있었다. 아니 설령 야자와가 5타수 5안타를 쳐서 역전이 되더라도 수위타자 7회의 관록을 자랑하는 장훈은 군말 없이 물러앉아 야자와에게 축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실책판정이 장훈에게서 수위타자 타이틀을 빼앗아 가는 개인적 피해를 끼친 데 그치지 않고 일본 프로야구사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http://blog.naver.com/sony815/110002644581
서로 다른 국적의 일본야구 세 거인
만약 장훈이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하면 페넌트 레이스 최우수선수에 선정될 공산이 확실했던 만큼 수위타자와 함께 최우수선수마저 놓치게 됨으로써 수위타자 기록의 연장뿐 아니라 양 리그에 걸친 최우수선수 수상이라는 프로야구사상 미증유의 금자탑이 될 수도 있는 대기록을 말살당하고 만 것이다. 장훈은 그때 그 판정만은 지금껏 체념을 못하고 있다.
-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장훈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결승타점을 올리고 경기 수훈선수로 뽑힌 후 장내 아나운서와의 인텨뷰에서 소감을 묻는 장내 아나운서의 질문에 장훈 선수는 이렇게 답했다. http://blog.naver.com/tin00tin/140015036196 장훈
"내가 치는 홈런과 안타 하나 하나는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있으며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동포들을 차별하는 비열한 일본인들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시원한 복수다 " 경기장은 뒤집혔고. 일본관중들은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웅 장훈 선수는 너무나 당당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그라운드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지금도 해외에 진출해 있는 국내 스포츠 스타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가 장훈선수처럼 자신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뜨거운 조국애를 보여주었으며, 그 어느 누구가 장훈 선수처럼 그들 앞에 당당할 수 있었는가? 아직도 일본 야구사에 전설적인 투수로 거론되고 있는 요미우리의 가데다 ( 한국명: 金正一)가 부와 명예를 위해 일본으로 귀화해서 순탄한 선수생활과 함께 은퇴 후에도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반면, 장훈 선수는 일본 야구계의 집요한 귀화 유혹을 끝까지 뿌리치고 많은 불이익을 감수 하면서도 한국국적을 버리지 않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3. 나오며
장훈 이라는 인물을 조사하면서 많은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내부의 차별이 이렇게까지 심각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기록만 놓고 보았을 때 장훈은 나가시마, 일본 도쿄〔東京〕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화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와세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195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구단에 입단하였다. ‘미스터 자이언츠’인 나가시마와 함께 ‘O-N포’로 이름을 날리며 9년 연속 일본시리즈에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1962년~1972년 11년 연속 통산 13차례 센트럴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였고, 1973년과 1974년 센트럴리그 3관왕이 되는 활약을 보였다. 외다리타법으로 유명하며 통산 868개로 미국의 최다 홈런왕 행크 아론(755개)보다 훨씬 많은 홈런수를 기록하였다.
왕정치와 비교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 성적을 낸 대단한 선수이다. 하지만 그는 적극적인 한국인이었고 또 한명은 순수한 일본인, 다른 한명은 소극적인 중국인 이었다는 점이 그의 스포츠적인 업적마저도 폄하하게끔 만든 것이다. 그보다 선배인 일본 야구사의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김 정일)와 레슬링 선수인 역도산이 귀화를 했지만, 끝까지 귀화를 하지 않고 일본 땅에서 자긍심을 빛내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것이다. 그 때문에 아직도 일본인들의 평가중에는 냉혹하리만치 날카로운 평가도 많이 있다. sabu1111 라는 아이디의 일본인은 http://bbs.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sports&nid=2468802
“프로야구 해설자인 그는, 단순히 ‘근성론’ 만을 얘기할 뿐, 기술적인 측면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아 바보취급을 받고있다.”라고 평가했다. 확실히 최근에 비해 왕정치, 장훈시대의 야구스타들이 기술적 측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기는 하다. 하지만 WBC일본대표팀의 감독을 맡은 왕정치 감독에 대한 비판은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아직도 일본에는 70만 명이 넘는 재일교포들이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채 외로이 살고 있다. 이들은 일본정부의 귀화정책과 사회의 차별 속에서도 꿋꿋이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정부나 국민들은 너무도 이들에게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든다. 그들을 귀화로 이끌어 뿌리를 잃게 하는 것의 책임은 우리에게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절대 약한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장훈은 야구로서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제는 우리의 행동이 필요할 때라 생각한다. “난 불구의 손으로 일본을 제패했다. 그런데 정상적인 몸을 가진 당신들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상에 올라설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장훈선수의 말처럼...
4. 참고문헌
- 방망이는 알고있다 - 장훈 瑞文堂
- 네이버 블로그 (각주 참조)
- 인조이재팬(http://enjoyjapan.naver.com)
- 일본야구기구(http://www.npb.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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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1.03
  • 저작시기2011.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2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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