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여의 흔적(문화재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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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부여의 흔적(문화재 기행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부여로의 기행
1) 부여 부소산성(사비성)
2) 낙화암
3) 백마강
4) 정림사지

2. 한 나라의 수도, 사비

3. 돌아오는 길에

본문내용

다. 옥개석의 네 귀퉁이를 목조 건축물의 처마와 같이 끝을 올려친 것은 이 상승감을 더 해주는 극적 장치로 작용할 수 있으며 아래쪽이 넓은 형태는 탑의 웅장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산물들은 역사에 의해 그 존재를 위협받고 변형, 파손되기도 한다. 이긴 자를 위한 역사의 산물들은 역사에 패배한 자들을 위한 기억조차 잊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기억하게도 한다. 역사의 산물인 문화유산 앞에서는 우리는 망국의 한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백제 석탑의 원류이자 아름다운 탑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정림사지 5층 석탑에도 망국의 한은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역사는 승리한 자를 위한 것이라는 진리를 새삼 되세시게 만들어 준다.
정림사지 5층 석탑 1층의 탑신부에는 백제 멸국과 함께 그 역사를 확실히 알게 하는 흔적이 남아있다. 660년 당 장군 소정방은 사비성을 함락하고, 백제의 흔적을 지우기에 여념 없었다. 사비성 안의 궁궐과 가옥을 불사른 소정방은 자신의 공훈을 남길 대상을 찾았고 사비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이 사찰의 석탑에 자신의 공훈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정복지의 문화유산에 정복자가 문화를 겹쳐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상당한 심리적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즉 피정복민들의 정신적, 문화적 상징물을 파괴하는 방법 말고 그대로 그 상징물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 정복자들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다. 피정복민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상징물을 파손하지 않을 것이며, 그 위에 피정복민들의 사상적 기반을 말살하고 새로운 지배 민족의 상징물로 재 탄생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의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그 예로 예루살렘엔 카톨릭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한다. 이는 겹쳐진 문화의 대표적인 예인데 이는 정복과정에서 등장한 결과이다.
백제의 수도 사비를 함락한 소정방은 백제민들이 옛 조국을 상기할 수 있는 상징물인 시내에 위치한 사찰의 정교한 탑에 자신의 공훈을 적음으로써 더 이상 백제민들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 다는 것이다. 소정방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의 1층 탑신부에 ‘대당평백제국 비명’을 세겼으며 이 흔적 140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 남아있는 망국의 한이다.
이 정림사지 5층 석탑과 소정방의 글귀에 대한 새로운 감회는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씨에 의해 새롭게 전해진다. 그는 1966년 낸 수필집 《가람문선》에서 ‘사비성을 찾는 길’이란 단문을 지어 40년대 부여성 정림사터의 평제탑(정림사지 5층 석탑의 예전 명칭, 백제국을 평정하고 비문을 세긴 소정방의 공훈기록에 의해 그렇게 불림)을 찾았던 옛 기억을 설명해 두었다.
“비록 백제는 망했으나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 당인의 필적이야 있든 없든 또한 평제든 아니든 탑은 탑대로 이름을 전할 것이다.”
2. 일국의 수도, 사비
한 나라가 있기에는 영토와 정부, 국민이 있어야하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체계와 문화 사회적 질서 따위도 필요하다. 특히 고대국가의 경우 왕을 중심으로 한 미성국 국가로서 왕의 지위와 행적, 거처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고대 국가의 수도는 곧 왕의 직할지가 된다.(읍제국가의 경우 수도 이외의 지역은 직할지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읍제국가가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후(즉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이후) 국가의 수도는 왕의 직할지 전역에 대한 정보, 물자, 군사, 문화적 통제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존속 가능하다.
공주의 경우 금강을 이용한 농업과 천연방어시설을 갖추었지만 오랜 정착이 불가능 했던 이유는 인구의 부족, 넓은 농지 부족, 천연자원의 부족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에 적합한 곳이 사비였다. 사비는 공주와는 달리 넓게 펼쳐진 평야를 지니고 있으며 금강의 수량도 공주보다 풍부하여 교통도 매우 편리했다. 넓은 토지와 큰 강은 대규모 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그로 인해 잉여생산량의 증가와 함께 인구의 증가도 병행된다.
또 지금 부여의 시내를 보아도 매우 평탄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은 농지가 아닌 성 내 주민들의 주거지가 되고 상행위가 일어나기 유리한 지형이다. 즉, 한성을 읽은 백제에게 있어서 이보다 좋은 수도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수비에 용이한 점도 하나의 장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고구려나 신라에 대한 공격 루트도 매우 용이하게 되어있다.
3. 돌아오는 길에
부여는 분명 망국의 수도이다. 망국의 수도에서 망국의 요인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당시 정치적 국제적 관계를 떠나서 봐도, 주요 내부 요인은 주로 망국의 수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신라엔 포석정이 있고, 고구려엔 거대한 산성들이 있으며 조선엔 척화비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각 국가가 멸망할 당시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켰던 요인들을 나타내주는 대표적인 것들로서 일국의 흥망에 있어 어떤 정책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여에서 찾을 수 있는 백제의 망국 원인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지형적인 부분에서 공주보다 유리하며, 편리한 교통, 넓은 농지, 많은 인구 부족한 것이 없던 당대의 백제에 있어 수도가 가지고 있는 단점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둘러본 정림사지 5층 석탑이 그 망국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사비천도 이후 급증하는 사찰과 탑들은 단순한 건축비용말도고 많은 국고 소모를 가져온다. 삼국시대의 사찰은 주로 성 내 평탄한 지역, 왕궁과 가까운 지역, 인구 이동이 많은 지역에 주로 건설된다. 즉, 행정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이 이 지역이 사찰로 변해가면서 그만큼의 중심지가 축소되는 경향을 가져온다. 또한 사찰은 사찰 이외에 많은 토지를 하사받거나 소유한다. 더욱이 왕이 창건한 사찰의 경우 면세는 기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조세 수취에 있어서 상당한 피해를 끼치며, 사찰 창건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은 액수이다.
백제가 국제적 고립을 당하는 7세기, 내부적인 결합이 이루지 못한 백제는 망국의 유적,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역사적 유물 앞에 작아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간다.

키워드

부여,   백제,   문화재,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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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12.07.03
  • 저작시기201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56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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