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_고대사_6조_골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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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_고대사_6조_골품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 차

Ⅰ. 서론 ························································· 1
1. 연구사 ······················································· 1
2. 접근방법 ···················································· 1

Ⅱ. 본론 ··························································· 3
Ⅰ) 역사학적 골품제 ········································ 3
1. 골제의 성립 ············································· 3
2. 골품제의 연구성과 ···································· 5
1) 성골과 진골 ········································ 5
2) 골품제의 기초집단 ······························· 6
3) 골품제와 관등·관직제도 ························ 6
4) 골품제의 성격 ····································· 7

Ⅱ) 인류학적 골품제 ········································ 7
1. 신분편성 ················································· 7
1) 초기국가 형성·발전과정의 신분편성 ······· 7
2. 골품제 ···················································· 8
1) 골품의 존재와 골품제라는 용어 ············· 8
2) 골품제의 특성 ····································· 8
3) 골품제 편성원리 ·································· 9
4) 골품신분 ··········································· 10
5) 골품제의 운용 ··································· 13
6) 골품과 거주지 ··································· 15
7) 생활기회 ··········································· 15
8) 생활양식 ··········································· 15
9) 골품제의 변동 ··································· 15
10) 골품신분의 유동성 ··························· 16
11) 골품제에 대한 반발 ·························· 16
12) 화랑도 ············································ 16
13) 골품제 소멸원인 ······························ 18

Ⅲ. 결 론 ······················································· 20

본문내용

5·16세의 나이로 귀당비장이 되었고, 검군은 낭도로서 사량궁의 사인이 되었던 것이 그 예이다. 그리고 화랑도의 활동을 끝낸 화랑들은 대체로 저정의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낭도들은 30세가 되어 화랑도를 떠날 때 병부로 들어가 병사가 되어가 농공(農工)으로 돌아가 향리의 장이 되었다. 향리의 장은 왕경의 경우 부·리·마을의 장이 된 것을 의미하고, 지방의 경우 진촌주·차촌주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화랑도의 활동은 왕경인에 국한되지 않았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라의 화랑도는 골품제 사회의 젊은이들에 대한 사회화 장치로서의 중요성도 있었지만 나아가 왕정을 유지하기 위한 인재의 양성기구로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 골품제 소멸원인
신라 왕국과 운명을 같이한 신분제로서 골품제의 붕괴원인을 볼 수 있다. 첫째, 골품제를 유지한 구심점이 되었던 왕의 위엄과 권력이 약화된 것을 들 수 있다. 원성왕 이후 신라의 왕들은 왕족 중 일정 종족의 대표가 되어 왕국 전체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잃어갔다. 그리고 골품제의 가시성과 명확성을 만들어준 색복 등의 금령이 지켜지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 결과 흥덕왕이 834년 옛 법에 의거하여 새로운 금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왕정을 수호하던 정치지배세력들이 분열되면서 그들 사이의 단결이 깨지게 되었다. 이는 골품제를 유지할 중심세력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둘째, 골품제를 유지한 방법에 문제가 나타난 것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골품제는 불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왕이 황룡사나 사천왕사 그리고 여러 원찰(願刹)들의 창건과 유지를 뒷받침해주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찰과 쇠퇴와 새로운 종파인 선종의 홍기는 골품제 유지의 사상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선종의 승려들은 처음부터 왕실의 도움 없이 선종선문을 열었다. 선종 사찰은 경제력을 보유하였기에 왕에게 바랄 것이 없었다. 실제로 문성왕 9년(897)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은 경문왕과 헌상왕이 왕경에 머물러달라는 요청에 심묘사에 머물기도 하였으나 끝내 성주사로 돌아갔다. 오히려 왕들이 선종사찰을 황룡사 등에 속하게 하여 선종을 왕을 위한 불교로 만들기를 원하였으나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선종의 승려들은 골품제의 틀을 벗어나려 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새로이 지방에서 성장한 성주·장군 등 세력가들은 청신한 정신으로 무장된 선종의 승려들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에 문제가 생긴 것을 들 수 있다. 국학과 독서삼품과 출신이 아니라 중국 유학생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들은 골품제가 존재하지 않는 중국의 제도를 익힌 집단이었다. 그런데 골품제로 인하여 그들은 신라에 들어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최치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제 유학생들은 신라에 대하여 소극적 또는 적극적 반발세력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화랑도 또한 변하여 골품제를 위한 사회화 장치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넷째, 상벌이 시행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지방의 성주·장군이라 칭하는 세력가들이 성장하였는데 왕국에는 그들을 처벌할 힘이 없었다.
다섯째, 골품제의 긴장을 완화하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백성들을 구휼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백성들은 살기 위하여 유민이 되어 도적이 되거나, 각지에서 성장한 군웅들의 군사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여섯째, 골품제는 모든 정부조직을 통하여 유지되었는데 진성왕 이후 정부의 통치조직 자체가 그 기능을 상실하여 골품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의 신료들에게 보수를 줄 수도 없게 되었다.
일곱째, 신라 말 골품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골품신분을 가졌던 왕경인들은 지방에서 성장한 군웅들보다 사회적·정치적 격이 떨어지게 되었다.
여덟째, 신라 골품제는 정치를 축으로 운용된 신분제였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왕정이 붕괴된 신라 왕국에서는 골품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는 카스트제가 인도의 종교와 도덕이 정치를 지배하는 사회의 산물이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인도의 카스트제가 정치와 관계가 없었기에 오래 유지된 점은 골품제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과 다른점이다.
Ⅲ. 결 론
신라(新羅)의 골품제도(骨品制度)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지배층(支配層)을 위한 그리고 그러한 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핀 같은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간과 할 수 없을 거 같다. 그러나 이러한 골품제가 가지는 폐단, 즉 지나친 폐쇄성 등이 신라 하대에 들어 사회적 문제가 되었고 결국 신라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골품제(骨品制)를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인데 그것은 앞서 서론에서 거론했듯이 단순히 지배층(支配層) 유지를 위한 신분제도(身分制度)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그 시대상의 사회모습, 관습, 풍습,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신라의 신분제도(身分制度)인 골품제(骨品制)를 통하여 정치(政治)나 사회(社會)뿐만 아니라 사회체제(社會體制)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사료(史料)가 충분치 않은 백제(百濟)나 고구려(高句麗)의 신분제도 에 대해 생각해보고 추측해 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골품제(骨品制) 연구의 필요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성골(聖骨)부터 1두품(1頭品)까지 나눠진 신분층을 가지고 그에 맞는 사회적 역할과 제약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시대상을 알 수 있었던 골품제도(骨品制度)의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 져야 할 것이며 또 진골(眞骨)과 성골(聖骨)의 구분, 그리고 각 두품(頭品)들의 차이점등 여러 가지 면에서 현재의 연구 성과에 미진한 점이 있긴 하지만 이런 점들은 차차 연구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하여 더욱 정확한 시대상황, 사회체제, 정치체제를 알 수 있는 연구 성과에 근접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또한, 서구 인류학의 학문적 성과를 과감하게 신라사 연구에 원용해 보려는 입장의 인류학자 이종욱은 전반적으로 그 다시 생활상·의복·골품제에 대한 생활상 등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것이 나타난다. 이에 이기동은 사학계의 입장에서 정치적·사회적체제로 정치조직과 신부제도와의 관계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키워드

신라,   골품제,   골품,   성공,   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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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0.04
  • 저작시기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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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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