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부와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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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정부와 인조반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끌고 청에 맞섰다. 하지만 한겨울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남한산성은 참담했다. 성안에 군량은 바닥났다. 산성지원에 나섰던 각 도의 군사들도 차례대로 패배했다.
국제적 역학관계를 무시한채 명분론으로 국제정세에 맞섰던 인조정권은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결국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45일만에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끓었다.
실리와 명분의 갈림길에서 정치권의 판단과 선택의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게 되는지 보여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조치와 제조지은을 배반한 외교적 비판을 하며 정치적으로 권력교체에 성공한 인조반정 하지만 인조반정 세력은 그 명분론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구조적 한계로 인해 그 변화를 능동적으로 막을수 없었던 것. 광해군의 비극은 정치권을 조정하지 못하고 내정에 실패한데서 비롯됐다. 하지만 인조반정세력 역시 광해군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광해군 정권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성토했지만 인조반정세력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광해군의 외교정책를 비난했지만 명분론에 발목잡혀 더 큰 비극을 불렀다.
인조반정은 조선사회가 성리학적 명분론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화시켜 나가는 하나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
광해군과 인조반정...그리고 노무현과 이명박............
http://blog.naver.com/uk8058/40046330735
1. 무지는 죄다..
포털 다음 토론방 아고라에서 이망박씨를 광개토대왕에 견주는 꼴갑들을 보며 그냥 몇자 끄적여 본다.. 아마 태왕사신기라는 드라마의 후광을 빌려서라도 감춰지지 않을 이망박씨의 '냄새'를 가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이망박씨를 광개토대왕에 견주는 그 글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무식하면 용감한거구나'라는 것 밖엔 없었다.. 생면부지인 그 글을 쓴 사람에게 이래 험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참 미안하고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그 '무지'가 내가 살아갈 이 땅의 역사를 20년 전의 되돌렸으며 또한 지금을 살고 있는 이들을 후대들에게 "죄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망박씨가 당선되고 그 인수위가 요란스레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떠올랐던 것이 "인조반정"이라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은 단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황제국"인 명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주장했던 서인세력들이 광해군을 "탄핵"하고 그의 지지세력이며 서인들의 정적이었던 북인(대북파)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를 왕으로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2. 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의 서자로 조선의 15대 왕이다..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온 '왜구'를 피해 파천하던 중에 세자로 책봉된다.. 이후 부왕인 선조가 의주로까지 도망가 명으로 망명할 것인지로 갈등하는 동안 '분조'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아 왜구와 대적해 싸웠다.. 왜란이 끝난 후에는 군무사를 주관하며 전란을 수습하고 일련의 개혁들을 단행하며 민심을 수습해 갔다.. 부왕 선조가 병중에 그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리지만 그의 즉위에 반대하던 신하가 그것을 감추는 등의 곡절을 겪은 후에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왕이 된 후 배다른 아우인 영창대군(광해군의 반대자들은 그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등의 인적청산을 단행한다.. 서인들은 이 사건을 '폐모살제'라고 하여 광해군 탄핵의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그는 재위기간동안 안으로는 전란의 복구와 재정의 확충, 민생안정을 위한 개혁들을 진행하며 성과를 보았으며 밖으로는 망해가는 명과 성장하는 후금 사이에서 명분과 실리를 살리는 중립외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권을 키우는 뛰어난 외교정책을 보여줬다..
3. 인조반정의 결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광해군의 정책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권력에서 소외받고 있던 서인들은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다.. 나는 앞에서 이 사건이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라고 평했다.. 광해군의 '탄핵'과 반정의 성공은 이제 막 안정을 되찾아 가던 조선에 또 한번의 외침을 불러온다.. 반정세력들은 그들이 '탄핵'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계승할 수 없었다.. 명과 후금사이의 중립외교를 폐기하고 '황제국' 명에 대한 사대와 충성을 서약함으로써 반정의 공인을 받고자 했다..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과 병자혼란이다.. 패전한 왕은 한겨울 꽁꽁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청의 칸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찢는 패전의식을 치뤄야 했으며, 왕의 백성 60만명이 노예로 끌려가고 매년 조공을 바치고 스스로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인조반정의 또다른 결과는 집권한 서인이 이후 조선후기 역사에서 권력을 주도하면서 점차 조선을 망국으로 서서히 이끌어 갔다는 점이다.. 숙종대에 이르러 서인에서 분리되어 나온 노론은 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권력의 시류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권력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이 '황국신민'을 거쳐 '국민'에 이르는 동안 권력에 대한 탐욕을 감추지 않았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다..
4. 마치며
이망박씨를 광개토대왕에 비견시키는 글을 보며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씨를 찬양고무할 생각은 없지만, 그가 어쩌면 당시의 지배세력들에게는 '눈엣가시'이며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광해군을 조금은 닮지 않았나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노무현씨도 별다른 허물없이 대통령의 일을 잘 수행해 왔다.. (FTA 관련 부분에대해서 만큼은 그의 허물이 될 것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과 취임은 광해군만큼이나 어렵고 힘들었다.. 또한, 그는 상식적이지 못한(아니, 몰상식한) 관행들을 거부하며 여러 개혁들을 수행해 왔고, 그 과정에서 임기내내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인 '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공격받고 상처받았다.. 이제, '기득권 카르텔'은 이망박씨를 내세워 반정에 성공했다.. 그는 1623년의 서인들처럼 이전 통치자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나는 역사가 반복될 것이 두렵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78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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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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