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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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하여

1. 머리글
2. 평양 산정현교회 약사
3.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4.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5. 맺음 글 :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의미

본문내용

선교사와 한국 교회를 분리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신사참배 문제를 둘러싼 교회 내부 갈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경찰 당국은 산정현교회에 대해서도 당회나 제직회에 주기철 목사를 사임시키고 신사참배를 하는 목회자를 초빙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상대적으로 강고한 제직회보다는 당회를 포섭하여 목적을 이루려 하였다. 그러나 (초반에는 당회가 조금 흔들린 면이 있지만)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끝까지 주기철 목사를 지지하였고 그가 검속되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당회와 제직회, 일반 교인들이 단결하여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제 당국이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대목이다.
둘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말기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방향을 앞서 보여주었다.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든 단체로든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1단계,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나 장로들의 예배 인도를 거부하는 2단계, 예배당 폐쇄 이후 '지하 교회' 형태로 반대운동을 지속하며 동지들을 결속하는 3단계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차원에서 벗어나 반대자들의 연대를 통한 조직적 저항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산정현교회는 이 같은 단계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그 결과 1938년 이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지방 교회 교인들이 평양으로 몰려들어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연대함으로 평양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 투쟁은 다른 지역에 전파되어 이후 전개된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내용과 방향 설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셋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위기의 시대 교회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타협'과 '훼절'의 역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938년 이후 평양기독교친목회와 그 영향 하에 있던 평양노회가 주도하던 '친일화' 과정에 산정현교회는 정면에서 저항하였다. 경찰들의 감시 하에 산정현교회에서 개최된 도미타 간담회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던 주기철 목사는 투옥 중에도 회유당하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주었고 교인들 역시 신사참배를 수용한 목회자나 장로들의 예배 인도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결의한 노회나 총회의 지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주기철 목사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제도권, 기성 교회 정치 조직에 대한 저항운동은 예배당 폐쇄 후 다른 지역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세력들과의 연대를 통한 '지하교회' 저항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넷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제 군국주의 폭력 통치에 저항하는 정치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기철 목사나 산정현교회의 저항 대상은 신사(神社)와 신도(神道)라는 '종교적 영역'의 것이었지만 이것이 종교로 위장한 전체주의 정치권력의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저항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면이 있다. 일제는 경찰 조직을 동원하여 노회와 총회를 장악하였고, 이들 '어용' 교회 조직을 통해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문제를 처리해 나갔다. 외견상 종교상 문제인 것처럼 위장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지시였다. 일제말기와 같은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없던 '신정일치'(神政一致) 시대에 종교적 저항은 곧 정치적 저항으로 연결되었다.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동기에서 저항하고 투쟁한 것이 그 시대적 상황에서는 정치적 반체제 운동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제가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을 검거하고 재판에 회부하면서 '치안유지법'이나 '보안법', '불경죄' '육군형법' 같은 정치와 체제 관련법을 적용한 것도 그 점을 반증한다.
다섯째,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 민족운동사 맥락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주기철 목사나 산정현교회 교인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항일 민족운동'이라는 측면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운동이 종교적이면서도 정치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녔음은 분명하고, 민족운동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우선 산정현교회가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에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산정현교회는 설립될 당시부터 '민족주의' 성향의 평신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였다. 1911년 105인 사건과 1919년 3·1운동 당시에 교회 목사와 장로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조만식·김동원·오윤선 등 산정현교회 장로들은 1920-30년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운동, 기독교청년회와 면려회, 신간회와 수양동우회 등을 통해 개량주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같은 개량적 민족운동이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중단되고 민족 저항운동이 단절되었던 일제말기 상황에서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민족 저항운동의 맥을 이었다. 즉 '민족 말살'을 지향하는 일제의 종교 정책과 지시를 거부하고 그로 인해 수난 당했다는 점에서 민족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녔다 는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일제말기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은 한말 이후 전개된 한국교회의 민족운동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가 민족 말살을 목적으로 한 종교 통제 정책을 수립한 후 '어용' 교회 조직을 내세워 교회를 통제하고자 했을 때 산정현교회는 목회자와 신도들이 일체가 되어 이에 저항했고 그로인해 박해받았다.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성경 진리와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결과와 영향력에서 정치적이고 민족적 저항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본훼퍼와 고백교회의 투쟁과 수난에 비할 수 있다. 그리고 독일 교회의 경우가 '민족 내부' 문제였다면 산정현교회의 경우는 '민족간'의 문제였다는 점에서 그 저항과 수난의 강도가 더욱 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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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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