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뒤흔든 여인들-지양성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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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지양성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역사에 제왕으로 기록된 황후_ 서한의 여후(呂后)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여인_ 동한의 등수(鄧綏)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여인_ 당대 무측천(武則天)

-황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여인_ 북송의 유아(劉娥)

-가장 오래 살아남아 권력을 누린 황후_ 청의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 씨

-중국 마지막 대권을 거머쥔 황후_ 청의 엽혁나랍(葉赫那拉) 씨

본문내용

만, 그들을 모두 제치고 그녀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곧 영원한 승리인 셈이다. 청태종 황태극의 장비인 효장문황태후 박이제길특 씨 포목포태는 살아서 명성을 남기고 죽은 뒤에는 추모되었으니, 분명 미소를 지으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중국 마지막 대권을 거머쥔 황후_ 청의 엽혁나랍(葉赫那拉) 씨
1900년 8월 4일,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황태후 자희(1835년~1908년)는 광서제(光緖濟)를 데리고 급히 달아났다. 그해가 경자년(更子年)이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경자지변(更子地變)이라고 한다. 조금씩 저물어 가던 자금성을 뒤돌아보면서 자희 태후 엽혁나랍씨는 통한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40여 년간 모든 것을 장악했던 자희는 줄곧 운명의 신이 자신의 편이라 여겼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일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48년 전, 엽혁나랍 씨는 열일곱의 나이로 함풍제(咸豊濟)가 등극한 이듬해에 팔기(八旗)의 수녀(修女: 황제의 후궁이 되기 위해 궁에서 온 사람)로 뽑혀 자금성으로 들어왔다. 자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 혜정(惠政)이 안휘(安揮)의 영지(領地) 태광도(太光度)를 지내며 5품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수녀의 품계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열여덟 살 이하로 나이 제한이 있었는데 마침 그해 자희는 열일곱 살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난귀인(難句人)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에 있는 수많은 미인 중 가장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가장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후비 중에서 하늘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람이었다. 그녀만 유일하게 함풍제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함풍제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말이다. 그녀는 곧바로 의비(懿妃), 의귀비(懿貴妃)로 신분 상승하여 후궁전에서 황후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아들이 후궁전의 평범한 여인이었던 자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함풍제가 붕어하자 그녀는 아들 덕분에 신분이 높아지면서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로 봉해져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녀를 바치고 있던 아들은 그녀가 정치라는 이 거대한 흐름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자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함풍제가 죽었을 때, 국토의 반은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이 점령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도 산산조각 나서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당시 영프 연합군이 북경성을 점거해 자금성과 원명원을 파괴하자 함풍제는 급히 열하(裂)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병을 얻은 함풍제는 여섯 살 난 어린 아들과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만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자희는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위로는 자안(慈顔)이, 아래로는 숙순(淑順)을 중심으로 하는 고명대신 여덟 명이 모든 권한을 쥐고 조정에 버티고 있었다. 또 황휘 경쟁에서 함풍제에게 진 공친왕(工親王) 혁흔이 북경에 남아 외교업무를 담당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당시 스물일곱이던 자희는 조정에 나선 경험도, 정사를 돌본 경험도 없었기에 누구에게도 경계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야심가였던 그녀는 아들을 낳은 순간부터 몰래 앞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함풍제가 새로운 미인들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정무에 관심을 기울였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진 함풍제는 모든 외교업무를 숙순에게 넘겨주면서 궁 안의 상주문을 살펴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의귀비 자희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를 대신해 상주문을 검토하는 일을 했다. 함풍제는 여인이 남자처럼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상주문을 검토하는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봤을 것이다. 품위있는 표정에 온몸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처럼 함풍제가 자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상주문 처리를 맡긴 것이다. 얼마 후 함풍제가 자희의 새로운 매력에 싫증내고 다른 여인들을 더 총애하긴 했지만, 익숙해진 탓에 줄곧 자희에게 상주문 처리를 맡겼다.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상주문은 하나같이 함풍제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내용들뿐이었다. 그는 눈앞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황권을 신하들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 일, 게다가 황후도 이 일을 맡아보려 하지 않았고 궁의 규율에 따라 태감에게 정사를 보게 할 수 없었다.
『홍루몽』에 심취했던 자희는 그녀가 있던 궁정의 벽을 모두 홍루몽에 나오는 장면으로 그려 넣었다. 그녀는 『홍루몽』을 수없이 반복해 보면서도 『홍루몽』속에 예견된 그녀의 일생을 알지 못했다. “빙산 위에 한 마리 암 봉황이 있었다. 그것은 구름이 갈라지면서 말세로부터 온 평범한 새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르고 두 번째는 호령하다가 세 번째는 사람에게 잡혀 나무가 되어 결국 금릉(今陵)을 보고 울부짖으니 이는 더욱 애통하도다.”자희는 처음에는 함풍제를 따랐고 두 번째는 동치제와 광서제를 호령하다가 결국 빙산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 재능이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대 청왕조에 겨우 남아있던 약간의 기운마저 탕진해 버리고 대 청나라를 빈털터리로 남겨 놓았다. 그녀가 죽은 지 4년째 되던 해(1912년)에 손중산(孫中産)이 남경에서 임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왕조는 멸망했다. 남경의 과거 이름이 금릉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죽고 나서도 모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자희는 죽으면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묻혔는데 이는 그녀가 저세상에 가서도 태후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지 19년이 되던 해, 침릉에 있던 금은보화는 모두 그것을 탐내던 군벌 손전영(損田英)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대포를 이용해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 자희가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모든 금은보화를 남김없이 가져갔다. 심지어 살아생전에 가장 존귀했던 그녀의 몸도 마치 시든 나무토막처럼 구석에 내팽개쳐졌고 반란군들은 서슴없이 이를 짓밟았다. 그리고 썩어문드러진 시체는 흙이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사라진 그녀의 이름, 사라진 그녀의 나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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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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