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일원론과 다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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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기말의 일원론과 다원론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세기말의 일원론과 다원론

차 례





1. 서론 3


2. 본론 5

1) 포스트주의의 다원론 5

2) 하버마스의 새로운(?) 일원론 7


3. 결론; 양자택일을 넘어설 수는 없는가? 11


□ 참고서적 13

본문내용

크와 부다페스트 학파 등 동구의 인간적 사회주의 그룹들, 뜨로츠끼주의자들, 그리고 이론적 성과는 떨어지더라도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들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만큼 19세기까지의 이론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베이스를 통해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맑스가 사용했던 도구는 정치경제학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치이론도 문화이론도 부재했거니와 프로이트 이래 발전한 정신분석학의 성과도, 20세기 철학의 커다란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천착도 담길 수가 없었다. 이러한 20세기 학문의 성과들을 모두 고려하고서 지금/여기를 보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그 작업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무리를 무릅쓰고 모티브라도 발전시켜본다면, 지금의 사회는 옛 일원론으로도 지금의 다원론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보다 더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에서 보자면 정치경제학만으로, 특히 토대결정론으로 지금 사회를 설명한다는 것은 이제는 전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문화영역의 분리정립과 팽창이 도저히 기계론적 일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헤겔까지와 같은 관념론적 설명은 이제 언급할 여유도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본다면 아무리 문화영역이 팽창했다 하더라도 경제영역의 강력한 제약을 부정한다는 것도 무망한 일이다. 포스트주의도 하버마스도 이 점에 대해 끝끝내 시원스러운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이 생명체이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상 경제영역의 중요성은 문화·정치와 더불어 최소한 1/3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 영역의 중층결정으로 사회를 설명하면 될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이 점에는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는 바, 경제영역과 문화·정치영역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제영역은 말 그대로 ‘물질적 토대’로서, 이를테면 제반의 사회현상들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 내지는 기반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문화 및 정치 영역은 그러한 물적 기반 위에서 인간의 다종다기한 목적의식적·능동적 활동이 전개되는 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그람시의 사회관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중 경제의 영역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이 구래의 일원론과 결정론, 폐쇄적 체계성에 해당하고 정치 및 특히 문화의 영역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이 작금의 다원론과 상대주의, 비체계적 개방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성주의의 문제도 예전처럼 맹목적으로 강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의 성과가 우리에게 버티고 있다. 과연 무의식의 규정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끊임없는 논란거리라 할지라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차원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도저히 없게 되었다. 또한 마치 아무리 문화영역이 확장된다 할지라도 경제영역에서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지 않을 수는 결코 없는 것처럼, 아무리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고 이성이 고양된다 할지라도 생명체인 인간에게서 본능과 감성(소위 ‘이성의 타자(他者)’)을 배제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마찬가지, 뒤집어서 말한다면 그만큼 이성의 역할과 중요성 또한 마찬가지로 강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애초 니체의 의도 또한 아폴론적인 것에 눌려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복권시키자는 것이었지 아폴론적인 것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아니었었음을 상기하자.
이러한 존재론적 고찰에 더하여 당위론적 감안을 하게 된다면 그 지향성 내지 규범성을 위하여는 이성주의적 추구감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수준에서가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버마스와 같은 맥락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원성과 다원성, 이성과 비이성, 체계성과 개방성 체계성과 개방성간의 대립은 헤겔주의와 해석학간의 수백 년에 걸친 대립의 핵심주제이다.
간의 이원적 대립을 극복하고 다원적 일원성(혹은 일원적 다원성), 비이성을 포용하는 이성(혹은 이성을 포용하는 비이성), 개방적 체계성(혹은 체계적 개방성) 나는 이중 전자를 옹호하는 입장인데, 그 이유는 지향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향성을 설명하는 데는 하버마스의 자기방어적 설명과 함께 고티에의 합의도덕론이 유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맑스도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나마 이들과 같은 맥락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경제학-철학 초고 및 독일 이데올로기에 의미있는 언급들이 나와있다. 어쨌든,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일원성과 체계와 이성에 친화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새로운 종합(Synthese)의 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환상의 조화’가 가능한지는 오히려 둘째의 문제이며, 적어도 더이상 극단적인 양편향은 적절한 분석틀도 대안도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두 극단이 가까워지는 작업이 앞으로의 작업과제일 것이며, 더불어 그러한 철학적 작업을 위해 정치경제학, 정신분석학, 문화인류학, 언어학을 위시한 최근까지의 제반의 성과들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 참고서적
윤평중, 포스트 모더니즘의 철학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서광사, 1992
푸꼬, 미셸 外, 구조주의를 넘어서, 인간사, 1990
하버마스, 위르겐, 인식과 관심, 고려원, 1983
하버마스, 위르겐,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 1994
하비, 데이비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1994
한정선 & 호이어, 안드레아스, 현대와 후기현대의 철학적 논쟁, 서광사, 1991
김재현, 위르겐 하버마스, 이론 10호, 이론사, 1994
도정일, 자크 라캉이라는 좌절/유혹의 기표, 세계의 문학 90년 여름호, 민음사
양운덕, 데리다의 해체이론, 사회평론 92년 7월호, 사회평론사
양운덕, 장-프랑수아 리요타르, 이론 6호, 이론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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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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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96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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