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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종][이희][고종 정치][고종 복식][고종 시대적 환경][고종과 친정][고종(이희)과 일본개입]고종(이희)의 정치, 고종(이희)의 복식, 고종(이희)과 시대적 환경, 고종(이희)과 친정, 고종(이희)과 일본개입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고종(이희)의 정치

Ⅲ. 고종(이희)의 복식
1. 고종의 법복
1) 면복
2) 원유관․강사포
2. 고종의 의대
1) 과두
2) 액주음

Ⅳ. 고종(이희)과 시대적 환경

Ⅴ. 고종(이희)과 친정

Ⅵ. 고종(이희)과 일본개입

참고문헌

본문내용

4년 1월 고종은 淸錢을 갑작스럽게 혁파하여 중앙정부는 극심한 재정적 곤경에 직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숙위군으로 400명 규모의 武藝廳이 있는데도 고종이 달리 파수군을 설치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궁궐의 숙위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과거 정조대의 壯勇營이나 헌종대의 摠衛營과 같은 하나의 군영을 설치하고 재정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대신들은 의심하였다. 또 이들은 친위군이 설치되면 국왕의 親衛를 배경으로 군사들의 작폐가 일어나고 다른 군사들은 이에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그리고 다른 軍門도 역시 국왕의 군사이니 파수군의 재원을 여타의 군문에서 끌어쓰지 말도록 요구했다. 특히 朴珪壽는 파수군의 설치가 단지 일반 군영의 군사를 선발하여 숙위를 증강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모두 훈련도감의 군졸로 구성될 파수군의 재원마련 대책은 국왕이 직접 관여하지 말고 훈련대장 등 將臣에게 맡겨두어도 될 성질의 것이라 못박았다. 또 굳이 파수군을 설치해야 한다면 將臣을 두는 하나의 軍營을 두어야지 항간의 의혹대로 장대한 계획 하에 파수군을 親兵으로 만들어 직접 거느리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국왕의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고종은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고종은 친정 직후에 있었던 경복궁 대화재사건으로 볼 때 숙위군의 증강은 불가피하며 숙위군은 분명 親兵이 아니라 궁궐 파수만을 목적으로 하는 하나의 군영이고 그 규모도 작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재원마련 대책에서도 정조대에 壯勇營을 설치할 때 內需司의 屯結로 재원을 충당한 예를 들면서 다른 군영의 재원을 옮겨오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설 武衛所는 대신들의 우려대로 대규모의 軍門으로 증편되어 당초 계획이었던 500명을 훨씬 넘는 800여명의 병력을 각 군문에서 차출하였고, 1874년말까지 兵額이 1,200여명에 달하였다. 이와 함께 설치 초기부터 중앙의 모든 재정기관으로부터 재원과 재정실무를 담당할 胥吏들이 충원되었다. 그리하여 설치초기인 1875년 현재 무위소 別庫의 錢수입은 내탕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 가운데 29만 5천냥에 달하였다.
Ⅵ. 고종(이희)과 일본개입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내에 진입하고 조선군 각 군영의 무기를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목적은 대원군의 섭정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고종은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각국 공사와 만난 자리에서 고종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는 가를 묻고, 앞으로 또 다른 사태가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고종은 일본의 개혁요구와 내정간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물리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인다. 고종은 칙령을 내려 대원군의 섭정을 인정한다. 이 사건에 대해 무쓰는 고종이 오토리에게 참정을 요구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는 대원군이 오토리에게 제안한 것이다. 또한 무쓰는 고종이 아산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격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일본군이 청군을 격퇴시켰다고 언급했으나 증명할 자료가 없다. 당시 일본공사관 일등서기관인 스기무라(杉村)의 회고에 따르면 아산에 있는 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위임장은 오토리의 요구에 의해 대원군과 조병직 외무독판이 주저하면서 작성해 준 것이다. 이 위임장 사본은 특사를 통해 오오시마 요시마사(大道義昌)여단장에게 보내졌으며 위임장과는 별도로 청군대가 순순히 철수하지 않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도 함께 전달되었다.
고종은 1894년 7월 30일 현임, 전임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일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와신상담하여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설욕하도록 하자”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참석한 전 영의정 김병시는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분노를 표명했다.
고종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전 승지 신기선이 올린 상소문에 대한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신기선은 상소를 통해 일본에 의한 개혁정책과 당시 정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자립을 잘하는 나라는 먼저 자립할 형세를 닦고 그 명색에 급급하지 않으며 개화를 잘하는 나라는 먼저 개화하는 실속에 힘쓰고 그 형식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와 외국군대가 대궐에 침범하고 요충지를 타고 앉아 생사존망이 남의 손아귀에 쥐여있는데 한갖 개국년호나 내세우면서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났다고 하면 자립이 될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신기선의 의견에 대해 동감을 표하면서도 일단 과거의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고종은 당시 정치상황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먼저 고려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국내정치를 바로잡고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 일본의 개입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 저항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개혁의 전권이 대원군에 있고 친일파들에게 정책의 시행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일단 일본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의 표출은 1894년 11월 4일 고종의 지시를 받아 의정부가 발표한 공포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 국가는 우호관계가 중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앞장서 힘쓰면서 하찮은 혐의를 개의치 않고 우리에게 스스로 자립하고 스스로 강하게 될 방도를 권하였으며 그것을 세상에 성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을 잘 알고 이제 규률을 크게 떨치여 함께 일어나서 동양의 판국을 안전하게 하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간고한 형편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울 기회이고 위기를 전환시켜 안전하게 만들때이다.”
참고문헌
○ 강상규(2005), 고종의 대내외 정세인식과 대한제국 외교의 배경,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 김성혜(2010), 1873년 고종의 통치권 장악 과정에 대한 일고찰,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 이성환(2010), 고종의 외교정책과 러일전쟁, 동아시아일본학회
○ 엄찬호(2008), 한말 고종의 중립화정책 연구, 강원대학교 사학회
○ 장영숙(2009), 대한제국기 고종의 정치사상 연구, 한국근현대사학회
○ 장영숙(2005), 고종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 연구 (高宗의 정치사상과 정치개혁론연구), 상명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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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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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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