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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善)과 선악과, 거짓말, 선(善)과 하느님(하나님), 흥부전(흥보전), 선(善)과 니체(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스토예프스키(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선(善)과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선(善)과 선악과
1. 자유의지란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인가
1) 창조섭리
2) 자유의지
2. 죄의 존재는 왜 허용되는가
1) 먼저 죄와 범죄의 정의를 내려 보자
2) 타락후 아담의 상태
3) 하나님의 명령(행위언약)의 역할
4) 죄의 작정섭리

Ⅲ. 선(善)과 거짓말

Ⅳ. 선(善)과 하느님(하나님)

Ⅴ. 선(善)과 흥부전(흥보전)
1. 본성으로서의 선
2. 부당한 대우와 흥보의 대응
3. 극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선 - ‘제비 치료’를 통해 드러남

Ⅵ. 선(善)과 니체(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Ⅶ. 선(善)과 도스토예프스키(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Ⅷ. 선(善)과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참고문헌

본문내용

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어린애들은 다른 애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 감정의 발달은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르다. 즉 어떤 사람은 남에게 고통을 주고 즐거움을 느낀다. 한편 부처(Buddha)와 같은 분은 어떤 생물이든지 괴로워하고 있는 한, 자기 자신도 완전히 행복할 수 없음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을 감정적으로 친구와 원수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리하여 친구에 대해서는 동정을 느끼고, 원수에 대해서는 동정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니체의 윤리에서는 동정이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동정에 대하여 공박하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하여, 그는 자기 교훈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Ⅶ. 선(善)과 도스토예프스키(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로 선과 악의 본질을 꿰뚫고자 했던 19세기 러시아 민중작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민중작가인 것은 대부분의 그의 소설에서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이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터전인 도시의 뒷골목이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이 곳에 사는 소외된 이들과, 그들의 자기파괴적인 범죄로 이어지며, 이러한 상황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선과 악의 문제를 개진하는데 적절한 심리적 상황을 연출해 내곤 한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필연적 허무주의는 곧 신의 문제에 대한 의문까지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서 신의 문제는 곧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이반 까라마조프가 신이 창조한 세계를 부정하며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들까지 고통 받아야 하지?\' 라고 의아해 하는 것처럼 그의 지하 생활자들은 신을 간과한 채 악의 눈으로 신의 세계를 평가하려 하곤 한다. 이러한 논리는 오류이다. 선과 악의 대결, 신과 악마의 대립구도라는 것은 본래가 \'신의 품안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그리스도적인 악의 주변에는 항상 선이 존재하고 있다. 아니 선의 주위에 악이 존재한다는 표현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라는 것은 언제나 선을 더욱 현실적으로 생동감있게 드러내는 구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그의 악한 인물들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악한 인물이라는 것은 악마와는 다른 의미이다) 선한 인물들의 부속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이반의 논리가 알료샤의 신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완전한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고 있으며 때로는 소설안에서 보여지는 사상의 클라이막스가 이들의 내부에서 일어나곤 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악령』의 스따브로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이반이 작가의 치열한 고뇌의 산물임을 간과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런 소설의 구도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전하고자 하는 \'선\'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Ⅷ. 선(善)과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선의 본질은 하늘과 땅, 땅 아래 있는 만물 속에 있다. 모든 몸에서, 모든 종류의 어류에서, 모든 나무의 씨에게, 초목에서, 사람과 짐승에게 신의 본질은 찾아진다. 그러나 그것이 더럽혀지지도 않고 부패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글에서 하나님은 자연에 의해서 변화되는 분이 아니며 최고의 선이라는 것과 영적인 것이든, 육적이든 간에 다른 본질은 모두 하나님에게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어거스틴의 죄의 이해를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죄의 원인은 교만(자신들이 얼마나 고상한 가를 보이려고 하고,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같이 더욱 고상한 것을 바라는 교만한 태도)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의 원죄는 다른 많은 죄들을 낳는다. 사과- 신성모독- 배신-살인, 이것은 모든 가능한 죄들 중에 가장 큰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 그러한 것을 야기시켰다. 죄는 측정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젼이 없는 상태이다. 질서의 미가 있는 우주안에 올바르게 정리되어 질서정연하게 되어 각각의 자리가 유지될 때, 악이라는 것이 더욱 두드러진 선을 요구하는데, 왜냐면 선한 것들은 악한 것들과 비교해서 더욱더 큰 쾌락과 찬양을 원한다. 이방인에게 조차도 모든 것을 통치하는 최고의 통치자로 인식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최고의 선으로서, 자신의 전능함과 선함으로 인해, 그가 악으로부터 선을 낳을 수 없는 분이라면, 그의 사역에 있어서 어떠한 악도 허용치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선의 결핍이라고 하지 않고는 어떻게 악을 말 할 수 있을까?(Augustine,-Enchiridion,3장11번, 342P)
그러므로 모든 자연을 창조하신 자가 최고의 선이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것은 선하다. 그러나 자연은 창조자의 비하면 최고의 상태가 아니며, 부동의 선도 아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사물속에 나타나는 선은 감소되거나 증가될 수 있다. 즉, 감소되어지는 선이 악인 것이다. 그러나 선이 아무리 많이 감소되어진 어떠한 것도 그것의 원래상태의 선의 정도가 적어도 어느 정도 남아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종류나 아무리 사소한 사물일지라도 그 사물 자신의 본성이 되는 선은 그 사물자체가 소멸되어지지 않고는 결코 소멸되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부패되어지지 않는 것을 칭송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리고 실로 소멸되지 않는 것으로서 부패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찬양을 받을 가치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참고문헌
김영일(1997), 선악과와 인류의 창조위치에 대한 고찰, 고신대학교
마베마사오 외 1명(1984), 선 과 니체, 선사상사
이봉휘(2006), 논술지도 관점에서 본 흥부전의 교수-학습 방법론 : 선과 악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주재용(1998), 악과 선의 하나님 :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한신대학교
조유선(2011),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 인간 고통의 두 양상, 한국러시아문학회
하태억(1997), 어거스틴의 역사관 이해 : 하나님의 도성과 고백록을 중심으로,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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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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