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사상의 이해 - 제1장 고려시대의 중세적 특질과 한계 & 제4장 유교적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역사적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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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사상의 이해 - 제1장 고려시대의 중세적 특질과 한계 & 제4장 유교적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역사적 반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사회사상의 이해


《 제 1 장 고려시대의 중세적 특질과 한계 》
1. 중세사회 규정에 관한 여러 학설
2. 중세사회의 공동체적 특질에 관한 이론
3. 한국 중세의 공동체적 질서와 향도 조직
4. 향도 공동체의 祭儀(제의)와 가면극(탈춤)
5. 한국 중세의 두 단계

《 제 4 장 유교적 경제발전 모델에 대한 역사적 반론 》
1. 유교적 발전모델을 제안하는 이유
2. 유교 자본주의 담론의 문제점
3. 조선 유교사회 발전 모델의 성과와 의의
4. 국가는 유죄인가?
5. 경제발전 토대의 진실

본문내용

인식 아래 국가주의(이권재상론)와 자유방임주의(재부민산론)가 양립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서양에 비해 국제교역이 양성화하지 못했지만 이념적 장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 평: 책에서는 지배층 중심의 역사인식을 경계하면서도 농업경제 발전에서 직접생산자인 농민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양상은 저자가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추구하는 때문으로 판단된다. (아마 대몽항쟁과 두 차례의 일본정벌 시도에 따른 혼돈을 벗어난 뒤 14세기부터 저평지와 저습지가 농경지화하는 데는 농민들의 처절한 삶과 관련된 사연이 작용하고 있다.)따라서, 지배층이 지배층을 대상으로 역사기록을 작성하는 시대, 그러한 시대에 대한 인식에서 농민을 적극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배층 중심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5. 경제발전 토대의 진실
19세기 서양 자본주의 경제가 동아시아에 밀어닥치면서 유교는 사회경제의 발달을 저해한 사상이며, 이를 청산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란 인식이 생겼다. 또한 서구지식인들 사이에 유교자본주의에 관한 담론이 대두하였다.
조선왕조, 대한제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볼 때, 유교문화는 결코 경제문제를 경시하는 사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편견이 생긴 이유는 서구문명의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18세기까지도 동양각국은 서양을 야만시 했으며 그런 문명이 19세기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을 보고 느낀 당혹감은 무분별한 판단을 낳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 유교문화권의 주요 국가들은 유교 때려 부수기의 구호와 정책이 난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유교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던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그 답은 물론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인들에게 비친 동아시아인들의 행동은 유교란 틀로 체계화된 동아시아인의 고유의 사유와 행동양식으로, 이로부터 완전한 일탈이란 자아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 전통문화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대응은 제 것 가운데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없는 것은 보충하고, 장점은 살려가는 것이다. 유교가 가장 튼튼한 뿌리를 내렸던 한국에서 이런 변신이 가능했다는 것은 유교가 산업화, 근대화의 적이란 그간의 인식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입증한다. 한국사의 경우,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일제의 악의적 선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유럽적 가치는 종교, 경제로부터의 국가 분리를 중요 내용으로 하며 이것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도 국가의 간여가 강하였으며 경제의 국가로부터의 분리도 엄밀히 파악해보면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도 동아시아사, 한국사에서만 국가의 간여가 유죄여야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전통이 강한 나라의 개입은 유죄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의 국가적 간여는 공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과론적 목적론적 해석이므로 정당시 될 수 없다.
국가의 간여란 것도 불필요한 간여가 문제이지 모두 부당하다는 주장은 비역사적이다. 이는 시장경제원리가 초시대적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제 각종 부정적 현상이 만연하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 평: 첫째, 저자는 유교와 중앙집권체제를 동일시하는듯한 서술을 자주 쓰고 있다. 연원으로 볼 때 유교는 분권체제인 중국 주대의 봉건제와 관계가 깊고, 중앙집권체제인 진한 시대의 군현제는 법가사상의 뒷받침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후대의 유교는 중앙집권체제를 지원했으므로, 저자의 말처럼 효과적으로 변신한 셈이다.
중앙집권체제를 통한 국가적 기획과 관여는 한국 중세사 중 특히 15세기에 농업경제의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15세기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14세기 후반동안 왜구로 말미암아 내륙 산간지역으로 대규모 인구이동이 일어나 많은 비옥한 농경지가 황무지로 변했던 사정은 국가적 기획력이 필요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 시기 국가가 국가차원의 공정이익 증대에 주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내면적으로 유교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더 추구해보아야 한다. 이 뒤 사회에서 유교의 힘과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가의 사적 이익 통제와 공적 이익 추구 기능이 약화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므로, 일시적 특수사정 속에 그와 관련해 국가기능이 작동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둘째, 유교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점을 갖는다.
조선시대 유교는 성리학이었다. 주자성리학에는 혈통에 따라 인간을 엄격히 구분하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또한 공자로부터 이어지는 도통상의 주요 인물에 대한 제사의례는 종교적 속성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저자가 유학이라는 용어 대신 일관되게 유교라는 용어를 사용한 데는 이에 대한 인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17세기 말엽 이후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내용이 차츰 새로운 성격을 띠어가고 피지배층의 지위가 상승해갈 무렵이 되면 유교 즉 주자성리학의 사회통합 기능은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이어 개항 후 사회통합이 시급할 때, 유교는 개화파, 농민층 모두에 대해 강력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랐던 유림과 개화파, 농민층의 이해관계를 조절하며 주권수호와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과제를 떠맡아야 할, 그럴만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던 존재는 국왕인 고종과 그 주변 고위관료들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이용했을 뿐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다.
셋째, 유교의 부정적 측면도 있다.
저자는 유교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사회구조가 아직 덜 고도화되고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로 파악되는 봉건적 또는 중세적 인간관계 속에 사회가 조직운영되던 중세사회와 달리, 개인의 개성 존중이 필요한 현재 사회에서 중앙집권체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적 기획과 개입이 과연 사회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지는 의심스럽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 때의 경제개발계획 성과를 염두에 두면서 국가적 기획과 개입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1960년대에 비해 1970년대 이후에는 그 부작용이 성과를 압도할 정도로 커졌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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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0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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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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