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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운동, 6 10만세운동]독립운동과 6 10만세운동,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과 실력양성운동, 독립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과 미주한인사회, 독립운동과 장터주민시위, 독립운동과 대한광복군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독립운동과 6 10만세운동
1. 6․10만세 운동의 의미
2. 6․10만세 운동의 원인
3. 6․10만세 운동의 계획
4. 6․10만세 운동의 전개
5. 6․10만세 운동의 결과와 영향

Ⅱ.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

Ⅲ. 독립운동과 실력양성운동

Ⅳ. 독립운동과 광주학생운동

Ⅴ. 독립운동과 미주한인사회

Ⅵ. 독립운동과 장터주민시위
1. 충북
2. 충청남도
3. 경상북도
4. 경상남도
5. 전라북도

Ⅶ. 독립운동과 대한광복군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총무재무서기검사 등의 부서와 임원을 두었다. 권업회는 1913년 10월 회원수가 2,600명에 달하였고 그 중 600명이 중앙조직의 회원이었다. 세계대전의 발발로 강제 해산되기 직전인 1914년 여름에는 13개 한인 거주지역의 지방조직에 회원수가 8,579명에 달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권업회는 1914년경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위해 大韓光復軍政府의 건립을 주도했다. 권업회는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시기를 한인의 시베리아 이민 50주년이 되던 해에 맞추었다.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에 해당하여 연초부터 러시아 내에서 ‘제2 러일전쟁설’이 팽배했다.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은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성과를 기초로 추진되었다. 1910년의 ‘합방’이래 권업회를 비롯하여 경학사, 부민단, 간민교육회간민회, 신한국민회 등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앞장서 서북간도를 비롯한 중국 만주지방과 노령 연해주 도처에서 은밀한 가운데 독립군을 양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멀리 하와이에서까지 박용만 등에 의해 대조선국민군단의 편성과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의 핵심인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의 주도로 中俄 양령에서 규합한 독립운동자들을 단합시켰다. 그리하여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도령’으로 선출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 당시에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되지 않앗더면 로시야에서 일본에 대한 복수전이 조만간에 닐어날 기미가 보이엇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은 中俄 양령의 연합대표회를 海港에 소집하고 ‘大韓光復軍政府’라는 비밀조직이 있게 되었다. 군사적 행동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민활한 수단을 취하기 위하여 중아 양령을 3개의 軍區로 分定하엿는데, 俄領은 제1군구로, 북간도는 제2군구로, 서간도는 제3군구로 지정하엿다. 거기에 대한 통제권은 正都領이 把握하엿고 그 직위에는 이상설이 당선되엇나니, 이것은 군사적 통일기관을 형성함에만 깊은 의의가 있을 뿐이 아니다. 재래의 분파심, 자서히 말하면 기호파니, 북도파니 하는, 그런 지방적 편견을 아주 근절하려는 거긔에 더욱 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俄中領 전역을 3개 軍區로 나누어 ‘正都領’이 통제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각지에 군대를 비밀리에 편성하는 한편 이동휘, 김립, 이종호, 장기영, 김하석, 오영선 등의 주도로 1914년 4월 俄中 국경지대인 중령 북만주 汪淸縣 羅子構의 한인촌에 광복군 사관양성을 위한 羅子構士官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俄中領에 산재해 있는 독립운동자들을 망라하여 하나의 조직에 통일단합시키고자 했다. 이는 고질적인 지방파쟁을 겪고있던 노령 한인사회의 상황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상설이동휘이종호정재관이동녕 등 대표적 인물이 대한광복군정부에 참여했던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즉시 실전에 투입될 광복군을 지휘할 ‘사령부’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전투가 개시될 때 동원될 병력의 규모를 이미 편제해 놓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일경에 압수당한 한 독립운동 관계 문서에 따르면, 대한광복군정부는 국외에서 편성될 광복군의 가용 인원과 武裝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시베리아 지역 29,365명, 槍彈 13,000柄, 목하 훈련중 △길림지역 260,000명, 창탄을 소유함. △撫松縣 지역 5,300명 그 중 江界砲手 4,607명, 그밖에 해산군인 693명. △왕청현 지역 19,507명, 그 중 산포수 19,000명, 나머지 해산군인 320명, 또한 그밖에 학생, 新式槍及彈 有함. △通化懷仁輯安 3縣 25세 이상 30세 390,073명이며, 現今 夜半集隊 교련, 구식, 신식 창탄 有함. △미주지역 855명, 학생 교관포함
이와 같은 독립군의 편성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그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와 중국 모두 자국 내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을 탄압한데다 군자금의 공급이 여의치 못해 이를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제시된 가용병력은 서북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시베리아, 미주 등 국외 한인사회 전체가 독립전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양성, 편제한 광복군을 망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모체가 된 권업회와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돌입에 따라 탄압을 받아 활동하지 못하고 그 이름만 遺傳하는 단명정부가 되고 말았다. 즉 ‘제2의 러일전쟁’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됨으로써 대한광복군정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일본과 공동 방위체제를 확립하면서 자국 내에서 한인의 모든 정치, 사회활동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에 따라 권업회는 해산되고《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지도자들은 물론 연해주 지역의 다수 비귀화 한인들까지 가차없이 투옥되고 추방당했다.
대한광복군정부가 와해된 데는 복벽주의와 공화주의 간의 이념적 갈등과 지방 파쟁 등 내부의 취약성도 작용했다. 이로 인해 미주한인사회와의 연계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대한광복군정부는 국권회복의 목표와 지도부의 단합을 고려하여 드러내지 않았을 뿐, 광무황제의 밀사인 이상설이 정도령으로 취임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復主義를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대한광복군정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임시정부가 아닌 혁명기 ‘군정부’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도령’도 정부의 ‘수반’이 아닌 광복군을 지휘, 통솔하는 ‘군사령관’을 의미했다.
참고문헌
김도형(2009), 3·1운동기 미주 한인사회의 동향과 대응, 한국근현대사학회
류시현(2011), 광주학생운동과 전국적 공감의 감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안외순(2003), \'애국계몽운동\'과 준식민지에서의 자유주의 :\'계몽\'의 양면성, 한국사상문화학회
윤대원(2006), 서간도 대한광복군사령부와 대한광복군총영에 대한 재검토, 한국사연구회
윤석수(1989), 조선공산당과 6.10 항일시위운동, 한국역사연구회
황적희(1996), 6·10만세운동의 민족사적 위상, 한국민족운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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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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