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의,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극동인민대표회의, 카이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회의, 남북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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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의, 건국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극동인민대표회의, 카이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회의, 남북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의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극동인민대표회의
1. 극동인민대표회의와 한국 혁명의 과제
2. 레닌 테제의 등장과 한인 공산당 조직들의 해체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카이로회의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회의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회의
1. 6개항 의견서
2. 2월서신
1) 김일성에게 보낸 것
2) 김두봉에게 보낸 것
3. 7거두성명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

Ⅹ.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월 7일 임시의정원 대표회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개정케 하고 또는 기타 중대 사건을 처리케 함’이라는 의안에 동의한 것은 비법행위이며 이는 의정원의 직권을 상실케 하고 의원의 체면을 오욕되게 하여 헌장을 문란케 하는‘ 행위라며, 김용철 이하 7명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된 윤기섭을 비롯하여 도인권, 문시환 등 15명 의원의 징계안을 제출하였다.
한편 국민대표회의에서 진행된 임시정부개조안은 분과회의로 이첩되어 토의된 후 5월 11일에 본회의에서 토론하였다. 그동안 시국문제로 제출된 결의안으로서 ’1. 신기구 건설안, 2. 국시확립안, 3. 신독립당 조직안‘ 등이 취소되고 개조안만이 상정되었다. 이와 같은 개조안의 채택은 임시정부와의 협상을 시급히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임시의정원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과 헌법 개정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안만이 상정되는 등 임시정부의 개조 방향으로 합일되어가자 기호파 조완구의원은 ‘국민대표회와 의정원이 병립하는 것은 의회사상 奇恥大辱이다’라는 성토문을 발표하고 임시의정원이 개조파의 앞잡이가 되어 의회의 신성함을 모독하였다고 공격하며 임시정부 개조안을 절대 반대하고 나섰다.
임시의정원내의 반발로 개조파와 임시정부와의 타협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대표자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5월 15일의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이진산과 김형식은 소속 단체로부터 소환통고를 받고 사임을 자청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대한국민회 대표 윤해가 대표회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천도교 대표 신숙과 수청남부소대표 오창환이 부의장에 당선되어 대표회의 수뇌부가 창조파에 의하여 점유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개조파는 모두 퇴장하여 무기정회가 선언되었다. 결국 5월 15일 회의를 끝으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었다. 그리고 개조파 42명의 명의로 5월 16일에 “통일의 유일 방침인 개조안이 부결되고 국호, 연호를 새로 정하면 하나의 민족에게 두 개 국가를 형성하여 가공의 화근을 심는 것이니 이런 현상으로는 회의를 더 진행할 수 없다”는 통고문을 발표하고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다. 5월 18일의 창조파만의 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Ⅹ. 결론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이 시기에는 연통부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 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그리고 상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 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함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위에 비록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정부체제였으나 그 운영의 기술이 미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의 수합을 위하여 국민대표회(1923)가 소집되었으나 성과 없이 끝났고, 두 차례의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을 추진한 바 있었으나 침체하여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회생시키기는 힘들었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그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을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이동하는 수난을 당하였다.
상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1938)류저우(柳州,1938)치장(基江,1939)충칭(重慶,1940)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차례로 이동, 기착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충칭에 있는 기간(1940~1945)에는 상해시대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성과로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傳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갔다. 그런데 한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침체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한 27년간의 세계사를 고려하면 영고성쇠의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로서 독립운동의 통할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815광복 때에도 한국의 문제가 한국민족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과 다르게 처리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영국미국소련 등 열강의 제국주의적 독단에 의한 결과였다. 그러나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였던 점은 27년간(1919~1945)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있어서 반성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심민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전지 현황, 범우사, 2001
윤대원,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여계언, 카이로(Cairo) 회담 연구 : 중국 국민당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정용대, 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및 유럽 외교활동, 삼균학회, 2002
최진홍,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정활동’ 연구,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1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삼균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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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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