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 김활란(金活蘭/아마키 카츠란 : 天城活蘭) & 위안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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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족주의자 김활란(金活蘭/아마키 카츠란 : 天城活蘭) &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해방전후사의 인식


Ⅰ.김활란(金活蘭,일본명아마키카츠란(天城活蘭), 1899~1970)
 ●약력
 ●대표적인 친일 행각
 ●친일의 길 걸은 여성 지도자의 대명사
 ●민족주의자 김활란
 ●반민족행위의 시점
 ●야마기 카쓰란이 되어 학병·징병을 권유
 ●반공전선에 서서 활동을 계속

Ⅱ.생존 위안부 할머니의 회고

Ⅲ. 과제를 마치며...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탄광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살 때 경상북도 대구의 한 양복점의 식모로 팔려나갔다.
그러던 1938년 3월경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며 나를 억지로 끌고 가려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南京)이었다.
난징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으며 그 병영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금수로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는 3층으로 된 벽돌집이었으며 각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X2.5m로 방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소름이 끼쳤으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잠시 후 일본군인이 방에 들어와서야 무엇을 당하는가를 알아차렸으나 절대로 응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다.
그러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으며, 하도 힘들어서 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로 때리고 차고 때로는 칼로 찌르기도 하면서 그들의 수욕(獸慾)을 채웠다.
나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 아편에 손을 대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들이 자신들의 성욕을 채우고 난 후 준 약간의 돈으로 구입을 하거나, 때로는 일본군 자신이 복용하고 있는 아편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아편이라도 먹고 견뎌보려고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당시는 지옥이 이보더 더 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는 정말로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 후 중국 내의 여러 위안소에 끌려 다니다가 광복을 맞아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과 신경쇠약으로 지금까지도 평생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내가 더욱더 서럽고 한스러운 것은 고향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레 나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고향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자책감과 억울함. 지금도 한밤중에 그때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데, 때문에 더욱이 이 원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Ⅲ. 과제를 마치며...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해방 전후기 이 두 여성의 삶에서 공통점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일본이라는 점이다. 여성으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여성 지도자로서 위대할 수 있었던 인물김활란이 처음부터 친일 행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수십년 간을 식민지로서 지배당하면서도 나아질 것이 없던 상황에 당시 지식인들의 패배주의를 대표하는 자치론의 신봉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최초의 신여성이 이런 식의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지만, 김활란 본인도 이런 역사적 평가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위안부로서의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위안부는 고국에 돌아와서도 일제의 망령으로부터 결코 해방이 될 수 없었다. 일제가 사회 전반적으로도 영향을 미쳤지만, 근대 여성의 자각내지는 성장에도 크나큰 왜곡을 가져온 건 분명하다. 반민특위 문제들과 더불어 우리가 청산하지 못해, 그 첫 시작부터 잘못된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이다.
Ⅳ. 참고문헌
{동아일보}.{매일신보}.
김활란,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김옥길, {김활란 박사 소묘}, 이화여대출판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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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0.16
  • 저작시기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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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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