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와 신참여주의 - 조헌용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소고』를 중심으로 (최성각 작품과의 공통점, 인물 분석, 내용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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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태와 신참여주의 - 조헌용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소고』를 중심으로 (최성각 작품과의 공통점, 인물 분석, 내용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 말
 1. 개론
 2. 최성각 작품과의 공통점
 3. 인물 분석
 4. 내용 분석
  1) 배무덤
  2) 신시도
  3) 까침바우

Ⅲ. 나오는 말

본문내용

완료된 이후의 모습이 또한 아름답기를 바라는 조헌용의 쓸쓸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마을 앞바다에는 기름이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집에 내려온 저는 여느 때처럼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물고기들이 살이 오르는 가을인데도, 다른 때보다 더욱 많이 낚이는 가을인데도, 바닷가는 한적했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가 저의 낚싯대에 잡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없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등이 굽은 물고기라니요? 이 섬도, 아직 싱싱하고 깨끗한 물고기가 올라오는 이곳도 얼마 안있어 등 굽은 물고기가 낚싯대에 올라오겠지요. 소설 본문
사람이 등 굽은 물고기를 먹고 살 수 없듯이 파괴되는 적나라한 현장 앞에서 해화가, 아니 조헌용이 갖는 희망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3) 까침바우
궁극적인 환경파괴를 목적으로 한 회유정책은 급기야 사람들의 유대관계도 파괴한다. 보상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까침바우에는 조개잡이 사람들과 김 양식 사람들의 갈등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어른들 사이의 갈등은 세상물정 모를 나이의 한빈마저 앞마다에 기름이 뜨듯 오염시키고 만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바다를 메운다고 까치바위는 조각조각 부서져서 바다에 실려 나갔다. … 어떻게 어른들은 마을 이름이기도 한 까치바위를 없애고 쓰레기장을 만들었을까? 소설 본문
자기 마을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던 한빈에게 파괴의 현장은 곧 한빈으로 하여금 지금껏 자신이 마을에 대해 가져왔던 자긍심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다툼은 급기야 지금까지 이웃으로 살던 사람들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발전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등교까지 거부하게 된다. 앞의 두 부분에서 설명한 바와 조금 다르게 인간 본성에 대한 파괴로까지 비춰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이제는 환경파괴가 사람들을 내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람들을 내모는 상황에까지 발전한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까치바위를 없애고 쓰레기장을 만든 새만금 간척사업 때문이며 그것은 어린 한빈에게도 슬기라는 여자아이를 빼앗으면서 새만금의 환경파괴는 이제 모두의 문제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Ⅲ. 나오는 말
작품 내의 소제목 ‘배무덤, 신시도, 까침바우’는 폐선으로 상징되는 소멸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해화와 그 가족,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 모두는 지금 소멸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거대한 산업자본과 정부권력의 연합에 의해 이른바 새만금 간척사업이 진행됨으로써 한 평화스럽던 마을과 그곳 주민들이 점차 생명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소멸의 미학적 관점에서 그려나간 이 시대의 특징적인 생태소설이다. 임영천, 「한국 생태소설 연구-조헌용의 한 중편소설을 중심으로」, <비평문학(제18호)>, 2004, 407p, 408p 결론부를 인용함.
그러면서 독자는 작품을 통해 지금 이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파괴의 현장을 대리 목격할 수 있으며 그 피해에 대해 스스로 판단한다. 갯벌이 메워지고 그 위에 터전을 잡고 살던 사람들의 삶이 이지러지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낙관하기에는 그 정도가 심각함을 깨닫게 한다. 그러면서 인간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사용되어 거부감 없는 기술문명에 대해 각종 기술과 공학이 서서히 파괴한 흔적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조헌용의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소고」는 단순히 환경파괴가 자행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불러오게 될 과정과 결과를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갯벌을 메우는 일이 왜 비난받아야 한가를 설득하고 있다. 더군다나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환경파괴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최성각 작품과의 공통점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실제 사건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조헌용의 이 작품은 더욱 구체적이고 절실한 사회참여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우한용은 그의 논문에서 “한 때는 훌륭한 창조로 나타났던 이 지구의 황무지에서 우리 모두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탐욕스러운 권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은 바로 말없는 피조물들의 고발이다” 한스 요한스, 이진우 역, 「책임의 원칙: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서광사, 1994
라는 말처럼 생태문학은 세계에 대해, 그리고 지구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주장이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되도록 하되 그것이 문학이기를 방법이 무엇인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 문학을 창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우한용, 「생태문학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 한국현대문학회, 2004. 12p
우한용의 이러한 발언은 시대의 변화를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참여주의 문학과 생태문학이 결국 같은 맥락에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참여주의 문학이 사회의 저변에 깔린 무수한 문제들과 변화에 대한 폭넓은 인식에 기인했다면 생태문학은 환경에 대한 접근방식에만 집중했다는 사실에서 참여주의 문학보다는 그 ‘사회 참여’의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문학을 新참여주의로 봐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본문에서 밝힌 것처럼 생태문학은 환경이 파괴되는 과정 이면에 함께 공멸할지 모를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환경파괴 자체가 사회문제라면 바로 이 사회문제에 대해 논의하려는 생태문학의 움직임 자체는 이미 참여주의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참여주의 문학보다 그 분야나 범위에 운신의 폭이 제한이 있으므로 생태문학은 新참여주의라 정의해도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생태문학이 위에서 중점적으로 설명한 조헌용이나 잠깐 예를 들어 설명한 최성각의 경우처럼 늘 실제 사건들을 중심으로 환경파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본 논문의 허점일 것이다.
참고문헌
채상우, 「위기의식과 문학적인 것의 불온성-1960년대 순수/참여문학 논쟁 연구」, <한국문학연구(제23권)>, 2000.
임영천, 「한국 생태소설 연구-조헌용의 한 중편소설을 중심으로」, <비평문학(제18호)>, 2004,
최성각,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 도요새, 2000.
우한용, 「생태문학의 방법론에 대한 고찰」, 한국현대문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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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8.31
  • 저작시기2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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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3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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