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과 두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이백과 두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품은 이임보가 실권을 잡게 되자, 당나라는 날로 황폐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노경에 접어들면서 혼용해진 현종이 자기의 아들 수왕의 비였던 양태진을 맞아 양귀비라 높이고 그녀에게 빠져 일야 유연만을 일삼고 모든 대소의 정사를 이임보에게 맡김으로써 사회의 기강마저 혼탁하게 흐려지게 되었다. 천보 6년 (747)에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할 목적으로 과거를 시행했다. 그러나 교활한 이임보는 한 사람의 합격자도 내지 않고 “야에는 슬기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현종을 기만했다. 이때 두보도 과거에 응시했다가 고배를 마시고 크게 분통했다. 이렇게 하여 당나라 조정은 악당들 손아귀에 놀아났고 차츰 모든 선비나 학자 및 지식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한편 국민과 유린된 당나라 조정은 부패와 방탕, 안일과 무능, 어둠과 실망 속에 급속도로 하락의 길을 재촉하고야 있었다. 이러한 모순이 바로 안녹산의 반란이었다.
(2) 후기 (755~770) - 안녹산의 난 이후
천보 13년 755 11월 안녹산이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당나라는 바야흐로 쇠망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보가 죽던 대종 대력 5년 (770)까지의 약 15년간을 후반기로 보며, 당나라의 모순과 불편이 사실로서 노출되어 사회와 나라가 전란과 쇠퇴에 빠졌던 시기였다. 백성들이 유리되고 안일과 부패에 젖은 통치계급은 마침내 끝장을 보게 되었다. 안녹산이 서북쪽에 15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불과 한 달도 못 되어 낙양이 함락되었고 이어 반 년도 못되어 수도 장안마저 적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현종은 촉으로 피난 갔고, 양귀비마저 죽였는데다가 당나라의 위세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숙종이 자리에 올랐으나 그도 별수가 없었다. 위구르족의 힘을 빌어 적과 싸워야 했고 따라서 숙종은 당나라의 인민과 재물을 위구르에게 적잖게 넘겨주기도 했다. 약 7년 이상 소용돌이치던 안사의 난이 대종 광덕 원년 763년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는 토번이 한바탕 장안에 쳐들어와 다시 한 번 난리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두보의 후반기는 당나라의 쇠락과 사회적 혼란기였다.
이상 두보의 시대를 훑어보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낼 수 있다. 전기에 두보는 문학가로서의 폭넓고 다양한 바탕을 마련했고 아울러 호매하고 활달한 기백을 배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후반기에 넘어가면서 애국애민하는 휴머니스트 두보는 민족적 자존심과 도탄에 빠진 백성에 대한 동포애를 시로써 발휘했고 아울러 무능과 부패에 젖은 통치계급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과 고발을 했던 것이다.
3.두보의 사상
시대와 사상은 한 인간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정정으로 치솟아 오르던 당나라가 안녹산의 반란을 계기로 급전 낙하하는 전환기에서 두보는 사회적으로 통치계급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전란의 비참과 역전의 포악으로 빚어진 암흑 난세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난을 목도했고 개인적으로 자신이 바로 ㅈ간난을 뼈저리게 맛보았던 것이다.
이에 천성이 선(善)하고 성실한 휴머니스트인 두보는 그러한 암흑, 부조리, 악덕, 비참, 고난을 성실한 리얼리즘과 인간애간 넘치는 휴머니즘의 문학으로 승화 결정지었던 것이다,
두가사상의 바탕은 유가(儒家)의 인애(仁愛)다, 두보는 스스로 유가임을 자처했다 .비록 현실사회에 실망하여 스스로 부유(腐儒)니 노유(老儒)니 하기도 했으나 그는 평생을 두고 임금을 보좌하여 백성을 안락하게 해줄 수 있는 정치참여를 갈망했다. 이는 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가정신이었다.
두보는 성실한 인도주의자였다. 나의 고생을 초월하여 모든 동포의 고생을 구제하기를 제일의적으로 염원했다. 착하고 약하고 죄 없는 모든 사람의 아픔이나 고난을 내 것 이상으로 아프고 쓰리게 동정하고 공감했다. 그러나 반면에 악한 강권자, 고식한 위정자들을 격렬하게 미워했다.비록 늙어서는 "나라 걱정에 눈물 흘리고 외로이 옷이나 수건 적시나" 젊어서는 말 타고 사냥도 했고 또 역적들에 잡혔다가 도망쳐 봉상으로 가서 숙종을 알현하기도 했다. 두보의 애국애민은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의 성실성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성실성은 그의 시를 형식적으로 대성시킨 정성과 노력의 연장이며 선의의 결정이라 하겠다.
4.두보의 시
이백은 일기가성, 하늘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듯 후련하게 시를 지었다. 그러나 두보는 세심하고 치밀하게 한 자 한 자 다졌다. 그렇다고 잘고 좁다는 뜻이 아니다. 형식이나 표현에 그만큼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고, 기왕의 모든 유산을 충분히 섭취하되, 오직 자기만의 독창과 신기(新奇)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넓고, 심각하고 또한 심각하면서도 새롭고 기발했다. 그러기에 두보는 특히 형식미의 최고를 자랑하는 율시에 있어서는 중국 문학의 대표적 걸작을 무수히 지어냈던 것이다.
두보의 시를 종합적으로 평하면, 위대한 휴머니즘의 사상을 적절한 형식으로 적응시킨 진지한 사실주의의 시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묘사는 냉철한 객관성을 지녔고, 언어는 정련되었고 운율은 엄정하다.
또 두보의 시 1,453수를 시체 ()로 분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5언고체...271수
고체(固) 7언고체...145수
시체() 5언율시...621수
율시(律) 7언율시...151수
배율(排律) 5언배율...123수
근체 (近) 7언배율...107수
5언절구...31수
절규(句) 7언절구...107수
5.두보의 시 한편
수안간상로 한성국자화
愁眼看霜露 寒城菊自花
천풍수단류 객루타청가
天柳 客
수정누음직 산혼새일사
水直 山昏塞日斜
아래귀조진 제살후서아
夜 啼后棲
수심 어린 눈에 내리는 서리나 이슬이 보이고, 외롭고 쓸쓸한 성채에 피어난 들국화 꽃이 아름답다
하늘 바람이 잎 떨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타고 불어오고, 객지에서 흘리는 눈물이 맑은 피리소리를 따라 떨어진다
고요하고 잔잔한 강물에 누각의 그림자가 곧게 비치고 산에 황혼이 들자 성채에 해가 비스듬이 기우네
밤이 되자 새들도 다 돌아와 잠들었거늘, 뒤늦게 둥지에 돌아오는 까마귀가 심하게 우짖고 있네
참고문헌:
신역 두보 ,장기근. 명문당, 2003
신역 이태백, 장기근, 명문당. 2005
당대 4걸, 채지충,
  • 가격1,4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9.30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649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