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신학 - 해밀턴, 알타이저, 루벤스타인, 죌레, 브라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사신신학 - 해밀턴, 알타이저, 루벤스타인, 죌레, 브라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윌리엄 해밀턴
■ 하나님의 죽음
■ 새로운 하나님 이해의 요구
■ 무력한 하나님
■ 낮아지신 그리스도
■ 그리스도인의 삶의 새로운 스타일 : 세속적 성자
토마스 알타이저
■ 사상적 배경
■ 케노시스 그리스도론
■ 케노시스의 하나님
■ 하나님 나라
루벤스타인
도로테 죌레
■ 전통적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 대리의 인간학적 개념, 그 구조
대리와 대체의 차이
■ 개인은 의존적 존재이다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리자
■ 그리스도의 잠정성
■ 우리와 같이 된 그리스도
■ 그리스도의 의존
■ 사람들 사이의 우리의 대리자
하나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잠정성
■ 하나님과의 동일
■ 세상에서 무력한 하나님
헤르베르트 브라운
■ 브라운의 하나님의 존재의 이해 : 하나님의 존재 이해와 실존화
■ 브라운의 실존적 해석과 그 결과
■ 참고도서

본문내용

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 한다. 이 신앙에서 그들을 하나님이 무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안다. 시간이 찼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이런 것을 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해야 할 때이다라고 죌레는 결론을 내린다.
헤르베르트 브라운
■ 브라운의 하나님의 존재의 이해 : 하나님의 존재 이해와 실존화
브라운은 불트만의 제자의 한 사람이지만 그는 실존적 해석을 철저하게 극단화해서 결국 인간학에 도달하여 ‘무신론적 그리스도교’를 지향하고 있다. 브라운은 ‘하나님’이라는 말을 가급적 포기하려고 한다. 그것은 이 말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공허한 개념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하나님은 ‘대상화’ 또는 ‘객관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자체로서 존재하는 자로서 하나의 유(類) 개념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도움을 받고 있는 것, 의무된 것의 근거”이다. 그것은 “나의 이웃 사람으로부터 나에게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스스로 타자에게 헌신하는 구체적 행동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다.“ ”나는 다만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말하는 곳에서만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서도 하나님은 결국 부당한 객관화가 아니고, 내가 의무 아래 있는 곳, 내가 참여하는 곳, 즉 무조건적인 “나는 할 수 있다. 와 ”나는 해야 한다.“ 에 관여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인간, 그의 이웃 사람과의 관계속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에는 하나님은 ” 이웃 사람과의 일정한 관계의 형태일 것이다. 그래서 브라운은 “무신론자는 인간을 잘못 이해한다. 아니 ”참으로 무신론자 같은 것이 있는가?“ 라고 묻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 이웃 사람과의 관계의 모든 경우는 벌써 신약성서 중심에 그렇게 밀접하게 ‘나는 할 수 있다’와 ‘나는 해야 한다’사이에 밀접한 관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사상은 그의 예수와 그의 시대에서도 볼수 있다. 브라운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인간은 안식일을 위하여, 즉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부터는 인간이 종교의식을 통하여, 즉 안식일을 지켜서 섬기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요, 곤궁한 가운데 있는 인간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는 것이며, 올바른 예배이다.
■ 브라운의 실존적 해석과 그 결과
브라운은 일관해서 실존주의적 해석을 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 이해’로 해소시키는데 대하여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해석에 의하면, “항상 그리고 다시금 일어나는 것을 찾는 그것이다. 즉 ‘믿는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것”에 있다. 그것의 내용은 인간의 구원은 자신을 넘는 데서부터 온다는 것, 그는 항상 그리고, 다시금“자신을 넘는 것”에서부터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브라운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신약성서의 3대 부분인 역사적 예수, 바울, 요한에 있어서 지배적인 ‘인간관’이다. 즉 그리스도론적 표현들과 칭호들의 가변성속에 있는 인간학적 정수(定數)이다. 그것들(그리스도론적 표현들과 칭호들)은 다만 이 내용을 위한 ‘암호들’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브라운은 그것을 “일반적 진리”라고 한다. 그는 이 인간학을 인간학적 이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한다. 그것은 한편 실존주의적 해석의 변호를 위해서(‘이념’이라는 개념의 현대적 불신임때문에) 또 한편 그렇게 되면 신약성서의 메시지가 사실상 인간학적 이론이 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진다는 싱각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라운은 ‘이념’을 유일회적으로 받아들여 질수 있고, 누구에게나 항상 접근될 수 있는 ‘일반적 진리’로 제한한다. 그 ‘진리들’은 리온적 보편성과 구별된다. 그 진리들은 다만 개개의 구체적 경험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진리들’은 인간의 구성요소라는 사실이다. 그 진리들은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호소할 수 있고, 그러므로 그것들에 대해서 말해진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신약성서가 말하는 것에 대한 그러한 이해에서 “믿게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보편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진리들’은 아예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세계의 과정에 개입하는 하나님이 일단 신화적 세계관에서 폐기된다면 그것은 끝장이 되기 때문이다. 브라운은 하나님의 개념에 의지함으로써 신학이란 칭호를 구한다. “여기서 객관적, 형이상학적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외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내적 활동을 통해서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한 ‘암호’이고, 따라서 대신되고 제거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그리스도론적 용어들은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이해하는가 하는 방식을 표현한다고 브라운은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만 인간이 그에게 대한 요구와 삶의 허락 사이에서 그의 상황을 존재의 피안으로 관계시키고 거기에서부터 그것을 고백하는 방식을 표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또한 브라운에게 있어서 예수는 확실히 이 실존적 경험의 과거의 설교자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칭호는 신약성서의 후기의 기자들에 있어서는 단순히 "바로 같은 경험을 위한 표현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를 통해서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결단은 없다. 그는 해방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약성서에서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브라운의 항목에는 가능성이 없는 말들이 된다.
■ 참고도서
ⅰ. 무신론(無神論) 시대(時代)의 하나님 - S.P. 쉴링
ⅱ. 하느님(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 G. 하젠휘틀
ⅲ. 신(神)의 세속화(世俗化) - 박봉랑
ⅳ.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ⅴ. 세계기독교사상전집
  • 가격1,6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5.10.27
  • 저작시기201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8549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