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국제관계론 다극화경향(반둥회의, 동남아시아국제연합, 미중화해, 중일국교정상화, 중월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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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아시아국제관계론 다극화경향(반둥회의, 동남아시아국제연합, 미중화해, 중일국교정상화, 중월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다극화
2. 반둥회의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3. 인도-파키스탄 전쟁
4. 중국-인도 전쟁
5.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6. 베트남전쟁
7. 오키나와 반환
8. 문화대혁명
9. 개혁개방정책
-시장경제 이행기(1978년 -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1992년-)
-개방 정책
10. 미중 화해 (1971년 7월 15일~72년 )
11. 중일국교정상화 (1972년 9월 29일)
12. 중월전쟁 (1979년 2월 17일)

본문내용

대외 개방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대외 개방지구에서는 다양한 우대정책을 실시해 외향형의 경제, 수출 확대, 선진기술 도입 등의 면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10. 미 중 화해 (1971년 7월 15일~72년 )
1971년 7월 15일닉슨미국대통령은자신의중국방문에대해중국과합의에달했다고발표했다. 그것은 중국봉쇄를 기조로 해왔던 미국의 아시아전략의 대전환이었으며, 동맹국이나 우호국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추진했기도 하여 ‘닉슨 쇼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세계를 뒤흔들었다. 닉슨은 이듬해 2월 중국을 방문해 미국이 타이완 해협 양측의 모든 중국인이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중 양국 및 제 3국이 패권을 추구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상하이커뮤니케’에 조인했다. 미중 화해는 외교관계의 정상화는 아니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미국과 중화민국(타이완)정부와의 외교관계와 방위조약에 일체 손을 대지 않으면서 고도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미중 양국 정상이 악수를 했던 일대 사건이었다. 사실상 타이완문제를 보류하면서까지 미국과의 화해를 결단했던 중국의 가장 큰 동기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던 소련과의 대립이었다.
중소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닉슨과 키신저는 중소분쟁으로 중국이 타격을 받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중국과의 비밀 교섭을 위한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특히 중요했던 것은 1969년 8월 초 파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닉슨 대통령이 칸(A.M.Tahya Khan) 대통령에게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는 어떠한 계획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중국 측에 전달하도록 의뢰했다. 1970년 초 닉슨과 키신저는 파키스탄 루트를 통해 전달된 비밀 메시지에서 중국의 지도자가 베트남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미국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방해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71년 4월 중국은 나고야에서 개최되고 있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미국 선수단을 초대하는 ‘핑퐁외교’를 극적으로 연출했다. 1971년 11월 중국을 방문 중이었던 팜반동수상에게 마오쩌둥은 남베트남 정권을 온존시킨 상태에서의 교섭에 의한 전쟁종결을 조언했다.
그 후 고립되었던 하노이를 교섭에 의한 전쟁종결로 유인하기 위한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거쳐 북 베트남 정부는 마침내 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 협정에 조인했다. 닉슨정권은 미중화해와 미소 데탕트의 역학을 이용해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를 추구했으며,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했다.
11. 중 일국교정상화 (1972년 9월 29일)
1972년 9월 29일 일본과중화인민공화국(중국) 사이의 국교정상화를 명시한 공동성명이 베이징에서 조인되어 전후 중일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52년 4월에 시작된 일본과 중화민국(타이완)과의 외교 관계는 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그 배경으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71년부터 72년에 걸쳐 표면화되었던 미중화해(닉슨쇼크)였다. 전후 당초 미국은 베이징에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당분간 타이완을 포기하고 중국정부와 외교관계 수립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에 의해 아시아에 냉전이 확대되는 가운데 이 정책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에 따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었던 그 날 일본과 타이완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국교가 수립되었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회복의 길은 멀어졌다.
그러나 8년 뒤 장기간 정권을 담당해 온 사토가 숙원이었던 오키나와 반환을 이뤄내고 퇴진하려는 것을 시야에 넣으면서 차기정권과 교섭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국교가 없던 시절부터 무역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실적 쌓기’ 방식에 의해 중국 측과의 채널을 만들려고 노력해 온 일본의 친 중국 단체나 개인들도 미중 화해를 전후해 활발하게 움직였다. 특히 수면하에서의 미중 간의 접촉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1970년 4월 중국의 저우언라이 4조건(대만이나 한국과 거래하는 업체와는 사업하지 않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일본기업의 대중 경사가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나아가 71년 9월 간사이 재계 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11월에는 도쿄의 경제인들이 중국을 방문했던 것은 일본의 경제계나 여론을 중일국교정상화로 향하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2. 중 월전쟁 (1979년 2월 17일)
1979년 2월 17일중공국경수비대가국경을넘어베트남령에침공함으로써일어난전쟁, 중·월전쟁이라고도 한다. 1978년 초부터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분쟁이 일어난 데 이어 5월에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의 대량 추방을 둘러싸고 중공·베트남 공산정권이 대립하였으며, 1978년 말에는 중국 윈난성[雲南省] 및 광시성[廣西省]의 국경지대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하였다. 중공측은 이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었는데,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은 베트남을 전면 침공하였다. 중공 당국은 이것을 자위반격(自衛反擊)의 한정전쟁(限定戰爭)이라고 발표하였다.
캄보디아에 많은 병력을 보내고 있는 베트남도 이에 응전, 베트남 북서부의 지방도시 및 요충지대는 격전장으로 변했다. 원래 중공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고, 그것을 소련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 비난하며, 소련·베트남의 ‘대소패권주의(大小覇權主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서, 중공-베트남 전쟁은 중·소 대립의 축도(縮圖)라고도 일컬어졌다.
중공군은 상당한 고전을 겪었으나 국경 부근의 베트남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방도시를 제압한 다음, 3월 5일 자위반격의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명분으로 철수를 개시, 3월 6일 철수를 완료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부터 중공 ·베트남은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주장하는 중공과 이것을 거부하는 베트남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 교섭의 주목적인 국경선 확정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국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이 전쟁 이후 베트남 난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여 국제문제화하였다. 양국은 1988년 1월 국경전쟁 종식에 합의하였으나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南沙群島]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양국 분쟁은 1989년 9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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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11.19
  • 저작시기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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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87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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