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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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산김씨의 유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文元公)이다. 벼슬은 형조참판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쳤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1717년(숙종 43년) 문묘(文廟)에 배향 되었고,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등을 비롯한 10여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그리고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 집의(執義)를 거쳐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올랐으나 공서(功西: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左郞)등 여러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여섯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때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내고 효종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南韓山城)이 포위되어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1674년(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設: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兩性)에 유배되었다.
익겸의 아들 만기(萬基)는 1653년(효종 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수찬, 교리, 정언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2년) 딸이 세자빈이 되고,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9國舅0로서 영동녕부사가 되어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 졌다. 총융사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워 보사공신이 되었다. 현종의 묘정에 배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우리 광김의 최초 족보인 서석보(瑞石譜)를 1677년(숙종 3년)에 만들었다.
그의 아우 만중(萬重)은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로서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태어나 1665년(현종 6)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거쳐 16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 삼남(三南:충청 남북도, 전라 남북도, 경상 남북도)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1679년(숙종 5) 예조참의, 공조판서, 대사헌등을 역임하고 예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이 되었다.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 하기위해 전문을 한글로 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706년(숙종 32)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사씨남정기, 서포집, 서포만필, 고시선등이있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다.
31세 덕령(德齡)은 봉섭의 아들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성혼(成渾)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號)를 받아 1594년(선조 27)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일본군의 호남진출을 막았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여 일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진 하였으나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하여 1661년(현종 2)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 되었으며 벽진서원에 제향 되었고 뒤에 병조판서에 가증되고, 의열사에 제향되었다. 정조 때에 좌찬성에 가증되었고 지금은 광주 무등산 충장사에 제향되어 있다. 시호는 충장공(忠壯公)이다.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운(光運)과 두남(斗南)은 진주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종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를 역임한 영덕(永德)은 1877년(고종 1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1885년 여주목사를 거쳐 동래부사, 감리 부산항 통상사무(釜山港 通商事務)등을 역임하고 판서에 이르렀다. 한일합방이 되자 통탄하고 자결 하였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 등은 가문의 기백을 굳건히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왜적의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지수(志洙)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결과에 의하면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남한에 총 174,912가구, 750,70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4. 광산김씨의 집성촌 (집성촌 통계)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일원
전남 나주군 왕곡면 옥곡리
충남 논산군 일원
경북 안동군 풍천면 신성동
전북 고창군 일원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난산리
전남 보성군 겸백면 용산리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대한리
전남 영암군 군서면 모정리

키워드

광산,   김씨,   유래
  • 가격3,000
  • 페이지수46페이지
  • 등록일2009.10.05
  • 저작시기2009.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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