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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조약에 따라 박영효가 일본에 파견이 되었는데 이때에 태극기가 처음으로 사용이 되었다. 청나라도 우리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는데 위안 스카이가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주둔을 하였고, 조선의 장정을 선발하여 훈련 시켰으며 그 지휘권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였다. 청은 조선과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재확인 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개항이후 근대화가 진행이 되는 과정에서 급진개화파들은 좀더 활기찬 개혁을 추구하기 위하여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등의 급진 개화파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하였지만 3일만에 정권이 무너지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정변을 주도하였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에 개혁정강을 발표 하면서 최초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갑신정변 당시에 주장한 14개조의 개혁정강은 이후 1894년에 갑오개혁에서 근대적인 개혁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후 조선과 일본간에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고 청나라와 일본간에는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갑신 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각이 없는 가운데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일어난 운동이라고 분석을 할 수가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정치집단은 개화당이었다. 갑신정변은 개화당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으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 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지 2년만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가들의 강력한 근대화 의지를 나타낸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년 후인 1885년에는 영국의 해군 함대가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이 일으킨 거문도 사건은 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는 막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곳이 바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 였던 것이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향하여 남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거문도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항구 이름을 해밀턴 항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거문도에는 당시 영국 해군이 활동하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거문도 사건은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개항이후 근대화가 진행이 되는 과정에서 급진개화파들은 좀더 활기찬 개혁을 추구하기 위하여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등의 급진 개화파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갑신정변은 일시적으로 성공을 하였지만 3일만에 정권이 무너지면서 실패로 돌아갔고 정변을 주도하였던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을 하였다.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에 개혁정강을 발표 하면서 최초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갑신정변 당시에 주장한 14개조의 개혁정강은 이후 1894년에 갑오개혁에서 근대적인 개혁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후 조선과 일본간에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고 청나라와 일본간에는 텐진조약이 체결되었다.
갑신 정변은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각이 없는 가운데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일어난 운동이라고 분석을 할 수가 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정치집단은 개화당이었다. 갑신정변은 개화당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었으나,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 하였다.
임오군란이 일어난지 2년만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가들의 강력한 근대화 의지를 나타낸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년 후인 1885년에는 영국의 해군 함대가 남해안의 거문도를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이 일으킨 거문도 사건은 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는 막기 위하여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곳이 바로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 였던 것이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을 향하여 남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거문도에서 철수를 하게 된다. 당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항구 이름을 해밀턴 항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거문도에는 당시 영국 해군이 활동하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거문도 사건은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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