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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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옥균 정치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본문내용

평등사상」 : 불교 평등사상의 영향 - 양반계급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견지, ‘후에 양반을 제법(除法)하지 않으면 나라가 잘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 양반계급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실로 혁명적인 사상
사회관
자유평등과 민권을 내세운 「자유민주사상」: 자기 자신들이 양반계급이면서도 양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서슴치 않았다는 것으로 실로 개혁적인 생각
「재정개혁」: 조세의 불평등에서 오는 폐단을 없애고 국민을 위한 정치실현으로 나라를 부강케 하고 아울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해 궁중 중심의 재정에서 정부 중심의 재정으로 개혁 근대 국가의 체제를 구축
「서정쇄신(庶政刷新)」 : 내시제도의 동양적 폐해를 없애고 탐관오리의 행패에 의한 민생고와 사회의 불신감을 해소시켜 기강 확립
「서구 부르주아 사상」수용 : 인민평등을 기반으로 혜상공국을 혁파함으로써 자유무역과 자유상 행위를 보장
∴ 인민평등을 주장하였고 평등사회 실현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여 행정력의 뒷받침으로 국민교육을 실시하고 외래문명을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
국가관
서양의「국가이성」개념 수용 : 서양과 같이 「중앙집권의 기초를 확립」할 것을 주장
「힘있는 현대적 국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 이 선행되어야 함 - 「獨全自主之國」을 樹立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함. 독립을 바라면 정치와 외교를 불가불 自修自强해야 한다고 주장⇒국가가 존립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적 토대로서 “부국강병”제시
「내셔널리즘(Nationalism : Principle of nationality)」: 국민국가를 떠받쳐주는 국민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성장하는 국민적 통일과 국가적 독립의 주장, 국민(nation)으로서의 자각, 다시 말해 스스로 국민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의 집합체를 바탕으로 함 - 내셔널리즘에 상당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위로부터의 내셔널리즘’ 주창
세계관
「중화질서」내지 「화이질서관」의 극복 : 국가적인 평등 관념이 깃들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건 그것의 상대화 내지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전제되어야함 - 화이관을 벗어나 새로이 다가온 서양 국가들에 대해서 관심⇒근대적인 국제질서 특히 만국공법에 대해서도 관심
「자강주의(自强主義)」사상 : “구미제국과 신의(信義)로서 국교를 유지, 국민을 개명화 시키며 부국강병 하여야 한다.”
「자주국권」: 자주독립하여 타국에 의뢰(依賴)하지 않고자주적으로 내정개혁을 하여 주권을 전 국토를 위해 스스로 행사할 것을 주장
Ⅲ. 결론
김옥균이 이끈 개화독립당 구성원들은 혈연 및 문벌 등을 배경으로 한 결합도 아니고 또한 유교의 예를 따지는 노론, 소론, 남인 등의 당파와는 달리 신분에 구애 없이 근대사상으로 결합된 집단이었다. 이들은 외세의 도전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지키고 근대적 조국을 건설하여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최초의 근대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민비(閔妃) 중심의 보수당이 청의 세력을 배경으로 정권 유지를 전제로 한 점진적 민물 수입의 개화파라면 김옥균은 국가의 자주독립에 초점을 두고 국가의 자주독립 유지는 자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하여 폭 넓은 외교활동을 통해 힘의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특히 김옥균의 주된 사상은 어느 한 나라에 의존하지 말고 동서양 열강들과 신의로서 국교를 수립하여 힘의 균형을 통해 청나라의 간섭의 배제하고 근본적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했다. 이러한 근본적 개혁의 성공을 거둔 예를 가까운 일본에서 찾아 모델로 삼자는 것이지 개화 자체를 일본에 의존하여 추진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고 볼 수 있다.
김옥균은 자신이 양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양반정치를 부정하고 사민 평등한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교육을 통해 구습에 젖은 전근대적인 인간유형을 새로운 제도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형으로 양성하여 이를 토대로 국가의 자주자립과 부국강병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실패의 배경은 당시 사회가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의 사업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되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고 국왕의 신임을 받은 김옥균이 국왕의 자문적 역할을 통해 적극적 개화정책을 펴게 되므로 이에 민비 일파가 반발하여 김옥균은 버림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김옥균이 고립에 빠진 것은 혁명을 통한 성급한 추진에서 빚어진 비극이었다.
갑신정변이 일본 의존성에 있었다 함은 당시 정세로 보아 갑신정변 성공 후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무력간섭이 명백하므로 청의 무력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될 일본 의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은 김옥균이 자기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정변이 아니고 근대적 입헌군주체제에 입각한 자유민권 실현의 문명개화로 주체성 확립에 역점을 둔 오직 구국 일념에서 임한 개혁운동이었다.
오늘날 그는 개혁적 정치사상가 이기보다는 친일인사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친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단지 너무 성급하게 갑신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이 그가 친일적이라는 평을 받게 한 주요 원인 일수도 있다. 황문수, 1994, 김옥균 전기, 문원, p.279
이런 면에서 김옥균의 인물 평가,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부동적이다. 그러나 그가 앞선 서구 문명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개혁의지를 가지고 정치사상을 펼쳐나가고자 했던 우리나라 근대화의 선구자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Ⅳ. 참고문헌
1. 마상진, 1983, “개화파의 개화사상에 관한 연구(김옥균의 개화사상을 중심으로)”, 경 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 정윤재 외, 1999, 한국정치사상의 비교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 95~147
3. 황문수, 1994, 김옥균 전기, 문원
4. <브리태니커백과전>

[2003. 6. 20자 기사]
5.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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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09.13
  • 저작시기20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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