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충분히 맞서 싸웠지만 그 뒤에는 고려의 세력이 내분을 겪게 되면서 여진에 대해서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문관세력이 윤관을 귀향보내면서 북진정책도 흐지부지되게 되고 처음에 여진을 상대로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게 되었고 여진에게 시간을 주게 되면서 여진은 세력을 확장해 결국 금이라는 나라를 설립해 고려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된다. 결국은 고려내의 정치적인문제가 고려의 대외정책에 악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이 후 이 같은 고려의 세력 다툼은 고려 인종 때 승려인 묘청과 유학자인 정지상 등이 고려가 개경에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를 정벌할 수가 있고 천하의 36개국이 고려에 조공을 받칠 거라는 주장을 하면서 서경천도 운동을 펼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김부식 등 개경파 문벌귀족에 의해서 제거 된다. 비록 초기에는 여진과의 전쟁을 통해 초기에는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후에 별무반이라는 준비된 세력을 통해 여진을 몰아내는 모습까지는 좋았지만 이후에 펼쳐진 내부 세력간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세력 약화를 통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마치며...
비록 고려가 거란/여진과 벌인 전투는 흔히 모두 패했다고 표현하고는 한다. 객관적인 사실로 보게 된다면 서로에게 입힌 피해를 계산해보면 고려는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과의 전투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단순히 패배자의 모습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두 전쟁은 평소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던 북방민족에게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 북방민족의 힘을 느끼게 해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도 굉장히 크지만 결국 거란은 우리나라를 완벽하게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고려가 거란을 상대하는 모습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 아닌 검차라는 기술을 통해 상대를 막아내고 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성전략으로 상대하는 것으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또한 일반적인 전쟁 이외에도 1차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던 서희의 담판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며, 3차 침공을 막아낸 강감찬의 귀주대첩 또한 거란에 대한 일방적인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비록 전쟁은 패하게 되었지만 거란은 그 후 고려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였다.
여진은 전쟁의 초창기를 제외하면 그 후부터는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전쟁을 이끌어 갔으며 초기의 피해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통하여 상대를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민족은 주변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한다고만 생각하는데 여진과의 전쟁은 흔히 여진정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초기의 침략에 대응하여 후에 병력을 구성하여 17만이라는 병력을 통해 공격을 행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정벌이 실패하게 된 것에 대해 고려 내부 세력 분열이라는 요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려가 금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시 고려는 금에 비해 인구도 확실히 적고 보병중심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진 고려의 국력으로는 인구도 많고 기병중심의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금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북진정책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몽고의 침략 때 강력한 저항정신으로 그리고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요동정벌론과 세종의 4군 6진으로 영토확장과 조선 후기에서 말에 이르기까지의 조선백성들의 간도개척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는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비록 고려가 거란/여진과 벌인 전투는 흔히 모두 패했다고 표현하고는 한다. 객관적인 사실로 보게 된다면 서로에게 입힌 피해를 계산해보면 고려는 결코 승리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가 거란이나 여진과의 전투를 통해 보여준 모습은 단순히 패배자의 모습으로만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두 전쟁은 평소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던 북방민족에게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 북방민족의 힘을 느끼게 해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우리나라가 입은 피해도 굉장히 크지만 결국 거란은 우리나라를 완벽하게 정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고려가 거란을 상대하는 모습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이 아닌 검차라는 기술을 통해 상대를 막아내고 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성전략으로 상대하는 것으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또한 일반적인 전쟁 이외에도 1차 침공을 승리로 이끌었던 서희의 담판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보여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며, 3차 침공을 막아낸 강감찬의 귀주대첩 또한 거란에 대한 일방적인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준다. 비록 전쟁은 패하게 되었지만 거란은 그 후 고려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였다.
여진은 전쟁의 초창기를 제외하면 그 후부터는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잡고 전쟁을 이끌어 갔으며 초기의 피해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통하여 상대를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우리민족은 주변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당한다고만 생각하는데 여진과의 전쟁은 흔히 여진정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초기의 침략에 대응하여 후에 병력을 구성하여 17만이라는 병력을 통해 공격을 행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정벌이 실패하게 된 것에 대해 고려 내부 세력 분열이라는 요인이 없다고 하더라도 당시 상황으로 보면 고려가 금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시 고려는 금에 비해 인구도 확실히 적고 보병중심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진 고려의 국력으로는 인구도 많고 기병중심의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금을 정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북진정책은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몽고의 침략 때 강력한 저항정신으로 그리고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요동정벌론과 세종의 4군 6진으로 영토확장과 조선 후기에서 말에 이르기까지의 조선백성들의 간도개척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는 우리 민족의 정신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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