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시대 백제의 전투원 포로 처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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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성시대 백제의 전투원 포로 처리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전투원포로처리와 관련된《삼국사기》백제본기 기사의 검토
3. 전투원포로 살해의 사회경제적 배경
4. 살해되지 않은 전투원포로의 처리
5. 맺음말

본문내용

포로 처리의 시대적 추이를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성시대에 목숨을 부지한 전투원포로들의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수와 군사들의 私奴隸(사노예)가 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의 공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近肖古王 23년(368)의 경우를 끝으로 장수와 군사들에게 전투원포로를 지급한 예는 찾을 수가 없다. 이는 기록의 누락이었다고 보기보다는 실제로 전투원포로가 지급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백제가 수행한 전쟁 가운데 그 진행사항이나 규모전과 등이 자세히 기록된 것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입장에서 보면, 4세기 후반 이후 사로잡은 전투원포로의 대다수는 공노예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무관한 일일 수가 없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근초고왕은 백제의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체제를 완성한 왕으로, 그의 통치기에 중앙집권적 통치조직의 정비가 일단락 되었고 또한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립되어 왕권의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귀족들의 경제기반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방통치조직의 정비에 따라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귀족의 읍락에 대한 지배력이 점차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새로운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써 토지와 그것을 경작할 노동력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여갔을 것이라는 점 또한 의심할 나위가 없다. 武寧王代(무령왕대)에 귀족들의 토지집적을 억제하기 위하여 토지매매 금령을 내린 것은 당시 그들의 욕구가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한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고 보면, 당시 귀족들의 농업생산에 있어서 전투원포로들의 효용성이 그 전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져갔을 것임은 짐작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투원포로들은 농업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귀족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시기에 그들에게 전투원포로를 상으로 지급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던 당시의 국왕들이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그와 같이 튼튼해지는 것을 달가워했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4세기 후반 이후, 사로잡은 전투원포로의 대다수가 공노예가 된 것은 결과적으로 귀족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변화와 전투원포로 자체의 성격 변화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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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4.02
  • 저작시기201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0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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