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 -친일 인사의 판별과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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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워지지 않는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 -친일 인사의 판별과 입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1. 머리말
2. 친일의 정의
II. 본론
1. 안익태
1) 친일명단의 생소한 이름, 안익태
2) 애국과 변절
3) 옹호론자들의 주장
4) 반박과 오류
2. 윤치호
1) 귀중한 사료, 윤치호의 일기의 저자
2) 윤치호의 사상과 행적
3) 애국과 변절
4) 그를 위한 변론
5) 반박과 오류
3. 박정희
1) 친일문제의 매우 오래된 주제
2) 2번의 개명
3) 친일행적
III. 결론

본문내용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정희는 다시 한 번 창씨를 개명한다. 그가 새로 개명한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이 이름은 어디에서 조선 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일본 이름으로 비로소 그가 완벽한 황국신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창씨개명이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3) 친일행적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대구사범 졸업 후 경북 문경에서 소학교교사를 하다가 일본인으로서 견마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편지를 쓰는 등의 세 차례의 시도 끝에 신경군관학교 1939년에 만주국 수도 신징에 설치된 학교로, 정식 명칭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이나 흔히 신경군관학교라고 부른다. 4년제 교육 기관이다.
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으며 같은 해 12월에 일본군 소위로 예비군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하였다. 이어서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겸 부대의 단기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고, 이듬해 7월 만주국군중위로 진급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인 박지만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 게제금지 가처분 신청에 배포금지를 추가하여 청구취지 및 원인 변경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 주 내용은 "1.박정희는 만주국 만주사변 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국가(1932~45).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일본 관동군은 1932년 1월 장쉐량[張學良]의 반만항일의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한 후, 2월 '신국가건설막료회의'를 개최해 만주국 건국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서 관동군은 구(舊)봉천 군벌계 장성들을 앞세워 청조의 폐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이라는 자리에 앉힌 후,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은 같은 해 9월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이탈리아·교황청·스페인·헝가리·폴란드 등 극히 일부 국가가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후 관동군이 러허 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를 점령해 만주국의 영역은 랴오둥[遼東]·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熱河]의 4성(省)에 이르렀고 인구는 3,000만 명에 달했으며, 1934년 9월에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경제면에서도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전 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해 개발사업을 독점하는 등 일본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의 만주군이었지 일본군으로 복무한 것이 아니며, 2.만주군의 주적은 마오쩌둥의 팔로군 1937∼1945년에 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
이었으므로 박정희는 만주국의 용병이 되어 중국공산당과 싸운 셈이며, 3.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이다. 그러나 만주국은 일제의 괴뢰국이며 만주군은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고 일본군 현역장교가 직접 지휘하는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엄연한 예비군 소위이며, 관동군에서 복무한 시기도 있었으니 잘못된 주장이다.
두 번째 주장은 팔로군은 항일부대이며 중국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는 당시로서의 연합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 특히 다수의 조선 청년들이 항일을 위해 팔로군에 복무하고 있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조선인 또는 독립군에게 위해를 가한 사실이 없다라는 주장은 박정희가 대일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박정희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적국의 장교라는 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IV. 결론
이들은 예술, 정치, 군사 등 각자 다른 분야에 있었지만 친일 행위를 했음은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들의 후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위의 근거로 이들에게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과거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후손들의 입장에선 말이 쉽지 실제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후손들이 한 일이 아닌데다가 그들의 후손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받게 되는 사회적 배척과 비난을 감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가슴에는 '日'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그들의 후대까지 괴롭힐 것이다. 소설 주홍글씨의 예처럼 그들의 선행에 따라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음에도 그들은 당장의 처벌이 무서워 형벌을 연기하여 처벌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들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비난받고 있다. 인명사전의 발간은 일제의 잔재를 벗어던지려는 진보적인 한 걸음이며, 후손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도 우리는 이 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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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백과, 「인종주의」, 『위키 백과』, 2006.1.10, http://ko.wikipedia.org/wiki
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2001), 역사비평사
이치목, 「사회, 경제적 민족운동」, 『이치목의 역사 공부방』, 2009.10.14, http://blog.naver.com/0169543
정상영, 「안익태 친일자료 또 나왔다」, 『한겨레』, 2006.11.07.
정운현, 「박정희 '친일파 선정' 어찌 되가나」, 『보림재』, 2009.6.15,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4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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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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