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온다, 언젠가 다시 그 시대는 온다.” - 츠바이크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칼빈,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4. 칼빈과 에라스무스 그리고 정리
칼빈은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성경을 보여주고 역설하며 가르쳐주는 가운데 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풍자라는 수사 기법을 통하여 어그러진 로마 카톨릭의 신관과 그들의 실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니면 인간이 어그러지고 거스러지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이 두명의 신학체계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차이는 명백하다. 적어도 기독교 강요와 우신예찬에서 나타나지는 차이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한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중재하시는 이인 그리스도와 성령. 이것을 밝히 깨달아 조명하게 하시는 성경에 대한 관과가 분명하게 신학적 차이로 드러나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우리에게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칼빈, 이 대단한 사람은 종교개혁을 이루어낸 사람으로서, 현재의 개신교를 만든 사람으로서, 그 영향력은 아직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에라스무스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한 세대 전 지식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다음 세대들도 겪게 될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에라스무스의 득세는, 휴머니즘 같은 관용 운동이 불관용적인 단일 진영과 마주칠 경우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격려, 고무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동시에 에라스무스의 몰락은,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관용’은 적대하는 두 배타적 진영이 경쟁적으로 충성을 요구하는 한 더 이상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 이후 모든 시대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직면했던 딜레마였다.
역사는 패배자들에겐 불공평하다. 역사는 절제의 인간을, 중재하는 자들과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열광적인 자, 중용을 잃은 자, 난폭한 정신과 행동을 추구하는 탐험가들이 역사가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 역사는 인류의 조용한 봉사자들을 경멸하고 무시했’지만, 살아가다보면 패배하게 될 줄 알면서도 지켜내야만 하는 어떤 이상이 있다. 아무리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될 지라도 말이다. 에라스무스의 후예들이 지켜내어야만 하는 인문주의 이상 말이다.
4. 칼빈과 에라스무스 그리고 정리
칼빈은 ‘사람이 자신을 아는 것은 바로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과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성경을 보여주고 역설하며 가르쳐주는 가운데 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은 풍자라는 수사 기법을 통하여 어그러진 로마 카톨릭의 신관과 그들의 실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바른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아니면 인간이 어그러지고 거스러지는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이 두명의 신학체계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차이는 명백하다. 적어도 기독교 강요와 우신예찬에서 나타나지는 차이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대한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중재하시는 이인 그리스도와 성령. 이것을 밝히 깨달아 조명하게 하시는 성경에 대한 관과가 분명하게 신학적 차이로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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