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무 관련 참고문헌 자료 수집 및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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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검무 관련 참고문헌 자료 수집 및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참고문헌

1. 가나다순 분류

2. 유형별 분류

3. 참고문헌 자료수집

본문내용

910년까지 궁중무희로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최순이를 기점으로 「진주검무」의 무원수와 진행절차가 바뀌었다.
즉, 최순이가 궁중무희로 있던 중 고종 광무 6년의 기록인『(임인)진연의궤』에 수록된「궁중검무」와 「진주검무」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으로 보아, 선상기녀인 최순이를 통해 「궁중검무」의 양식이 민간 연희화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춤의 연행방식에서 민간 연희화된 양상은 무원수와 진행절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주검무」의 무원수는 8명으로 이는『(임인)진연의궤』에 기록되어 있는「궁중검무」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춤의 진행절차에 있어서 한삼춤이 추가 된 것은 당시 한삼을 들고 추는 「첨수무」의 양식이 전파된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현행 「궁중검무」는 4명의 무원으로 연행되고 한삼춤이 제외된 입춤, 앉은춤, 칼춤으로만 연행되어 「진주검무」와는 다른 양상으로 연행되는데, 이는 「진주검무」가 최순이에 의해 『(임인)진연의궤』에 기록된 독특한「궁중검무」의 형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여진다. 이처럼 「진주검무」에서는 현행「궁중검무」에는 전승되지 않는 조선 후기의「궁중검무」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현행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 「궁중검무」의 형식이 민간 연희화 된 춤으로 현재까지 연행되고 있다. 이렇게 궁중의 형식이 민간 연희화 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교방의 선상된 여기들에 의해 가능 했던 것이며, 이러한 기녀를 매개체로 하여 궁중과 민간의 춤이 활발히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라 사료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역사적 틀 안에서「진주검무」가 단순히 지역검무가 아니라, 궁중과 민간의 다양한 상호교류를 통해 전승되어 왔음을 밝히고자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민간 연희화의 과정을 밝혔다는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목차
Ⅰ. 서론
A.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B. 연구의 방법 및 제한점
Ⅱ. 이론적 배경
A. 조선후기 궁중정재의 전개양상
B. 조선후기 교방정대의 전개양상
Ⅲ. 궁중검무와 진주검무 특성 연구
A. 궁중검무
B. 진주검무
C. 현행 궁중검무와 진주검무 비교
Ⅳ. 궁중검무와 민간 연희화 과정
A. 궁중검무의 민간 연희화 과정 사적 고찰
B.연행방식을 통해 본 궁중검무의 민간 연희화 과정
Ⅴ. 결론
참고문헌
결론
본 논문은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는 궁중검무와 진주검무를 고찰하고, 선상기녀를 통해 궁중검무의 형식이 진주검무에 전파되는 민간 연희화의 과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조선 시대는 예와 악으로 정치를 행한다는 유교정치의 이념아래 악무를 중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왕의 업적을 과시하고자 연행된 정재분야가 매우 발달했던 시기였다. 특히, 조선 후기 순조시대에는 50여 종의 정재가 창작되어 궁중정재가 매우 부흥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재는 단순히 왕실에서만 연행된 것이 아니라 지방의 교방에서도 연행되었으며, 지방 관아의 행사와 사신들의 접대를 위한 연향과 같이 공식적인 연향에 정재가 연행되었다. 조선 후기 진주교방의 공연물을 기록해 놓은 「교방가요」를 보더라도 정재가 무려 14종이나 기록되어 있어 지방 교방에서도 정재가 연행된 중요한 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교방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조선 후기 궁중의 여악의 혁파로 인해 지방 교방의 여기들이 궁중의 주요 연향에 선상되어 궁중연향에 참가하였다가 다시 귀향하는 방식으로 바뀐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궁중으로 선상된 여기들이 다시 지방 교방에 돌아와서 궁중정재를 민간화 시켰으며 선유락, 항장무, 사자무, 검무와 같이 지방의 춤을 궁중으로 전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교방의 기녀를 매개로 하여 궁중과 지방의 춤 문화는 매우 활발히 상호교류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검무는 궁중과 지방 교방에서 두루 추어졌던 춤으로서 조선 중기에 지방에서 추어졌던 검무가 궁중정재로 채택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궁중검무의 형식이 지방 교방의 검무에 영향을 주는 양상이 나타났다. 즉, 교방을 통해 검무가 궁중으로 유입되고 조선후기에 다시 지방으로 전파되어 전승되는 독특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궁중의 형식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지방 교방의 대표적 검무는 진주검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교방을 통해 춤이 상호교류 되었던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 안에서 궁중검무의 형식이 진주검무로 전파되는 과정을 문헌과 연행방식을 통해 살펴보았다. 본 연구에 대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교방 기녀의 선상제도가 활발했던 시기에 조선음악통사의 여악조의 기록을 보면 진주지방의 기생이 선상되었다고 보인다. 구체적으로 이 기록에는 경기의 수가 부족할 때 지방기생을 보충한다고 하였고 이어 진주지방에서는 검무가 특색이라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진주지역 여기가 선상되어 궁중의 형식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사료된다.
둘째, 진주 교방소속 여기인 최순이(1884~1969)는 1901여 년부터 1910까지 궁중무회로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최순이를 기점으로 진주검무의 무원수와 진행절차가 바뀌었다.
즉, 최순이가 궁중무희로 있던 중 고종 광무 6년의 기록인 『진연의궤』에 수록된 궁중검무와 진주검무가 매우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으로 보아, 선상기녀인 최순이를 통해 궁중검무의 양식이 민간 연희화 되었다고 보인다.
이와 같이 진주검무는 조선 후기 궁중검무의 형식을 엿볼 수 있는 춤으로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특히 검무는 지방에서 궁중으로 채택된 정재지만 조선 후기에는 다시 궁중에서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거쳐 진주검무와 같이 궁중정재의 형식을 갖춘 독특한 지역 춤으로 전승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궁중의 형식이 민간 연희화 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 교방의 선상된 여기들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며, 이러한 기녀를 매개체로 하여 궁중과 민간의 춤이 활발히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라 사료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역사적 틀 안에서 진주검무가 궁중과 민간의 다양한 상호교류를 통해 전승되어 왔음을 밝히고자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민간 연희화의 과정을 밝혔다는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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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2.11
  • 저작시기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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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7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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