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2. 리트머스지가 준비되다-신학적 분열의 징조
3. 리트머스지를 담그다-분열의 양상
3.1. 1차분열 고신파
3.2. 2차 분열-기장파
3.3. 3차분열-통합/합동의 분열
3.4. 리트머스지에 대한 해석-온도차
4. 중화반응(中和反應). 한 번 해보자.
2. 리트머스지가 준비되다-신학적 분열의 징조
3. 리트머스지를 담그다-분열의 양상
3.1. 1차분열 고신파
3.2. 2차 분열-기장파
3.3. 3차분열-통합/합동의 분열
3.4. 리트머스지에 대한 해석-온도차
4. 중화반응(中和反應). 한 번 해보자.
본문내용
, 세계가 보는 우리는 대단하다’는 식의 국가홍보영상물이 각 매체를 통해 매일 반복되고 있다.
정말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났는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단어의 평가에 담겨있는 함의만을 바라봐도 이념의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라는 구획 특별히 개신교에 국한한 영역만을 바라봐도 이념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개신교사의 영역 안에서 보혁의 문제를 제기함으로 획득되는 결과물은 무엇인가? 다음 한종호의 말은 이런 의미를 잘 전달해준다.
“좌와 우의 대립은 다만 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민중들에게 어떤 길이 더욱 그들의 미래를 위해 행복한 길의 선택인가를 고뇌하게 하는 물음이었다. 따라서 진보-보수 논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선과 악의 평가를 포함하여, 어떤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가 그들 모두에게 선과 의로움인가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한종호, 위의 글, 52.
한국개신교사에서 제기되었던 보혁의 문제는 위에서 제기한 의미와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정황에서 내걸었던 ‘가치’ 혹은 ‘진위여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분열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던 내면의 저류에 흐르는 가치가 ‘교권의 획득’이라는 의혹의 눈초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우리 개신교사에서 좌와 우가 정당한 테이블에 앉아 ‘어떤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다. 설령 가시적인 모습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슴 한편엔 다른 계산법을 가지며 앉아있지는 않았을까? 그 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민족을 두 팔로 안고라고 말했던 그들은 혹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리트머스지의 감별법 속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파란용지와 거의 구별이 가지 않은 붉음을 보이고 있어도, 내가 살아야하니까, 내 편이 붉다고 하니까 마음 한 구석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붉다고 말하며 ‘생존’했던 시대는 아니었을까? 물론 여전히 시대는 ‘생존’을 요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중화반응을 아는가? 학창시절 학교에서 배운 ‘중화반응’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산의 수소이온(H+)과 염기의 수산화 이온(OH-)이 반응하여 물과 염을 생산하는 반응 말이다. 산과 염기가 이온의 상태로 끊임없이 반응하는 상태. 혹은 물과 염과 중화열로 결론지어진다하더라도 말이다. 너는 빨강이다. 너는 파랑이다라는 신학적 리트머스지를 가지고 상대를 규정함으로 나를 세우려하지 말아보자. 이제 감별의 시대를 넘어서보자. 동일성의 허구적 폭력적 신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집, 오이쿠메네에 뛰어들어보자. 거기서 나와 네가 끊임없는 이온상태로 부유할지라도. 거기서 너와 내가 물이 되고 염이 되어 열이 나더라도 말이다. “사상의 시대, 이념의 모색을 기피하고 낡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사회철학의 빈곤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 스스로의 정신적 성숙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진보이건, 보수이건 양측 모두 오늘날 우리 현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누가 가장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들이 가장 절박한 처지에 몰려서 좌절하고 있는지를 봐야할 것이다.” 한종호, 위의 글, 57.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표준새번역 개정판.
정말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이 났는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단어의 평가에 담겨있는 함의만을 바라봐도 이념의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라는 구획 특별히 개신교에 국한한 영역만을 바라봐도 이념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개신교사의 영역 안에서 보혁의 문제를 제기함으로 획득되는 결과물은 무엇인가? 다음 한종호의 말은 이런 의미를 잘 전달해준다.
“좌와 우의 대립은 다만 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민중들에게 어떤 길이 더욱 그들의 미래를 위해 행복한 길의 선택인가를 고뇌하게 하는 물음이었다. 따라서 진보-보수 논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선과 악의 평가를 포함하여, 어떤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가 그들 모두에게 선과 의로움인가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과정이었다.” 한종호, 위의 글, 52.
한국개신교사에서 제기되었던 보혁의 문제는 위에서 제기한 의미와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각각의 정황에서 내걸었던 ‘가치’ 혹은 ‘진위여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분열의 역사에서 보여주었던 내면의 저류에 흐르는 가치가 ‘교권의 획득’이라는 의혹의 눈초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우리 개신교사에서 좌와 우가 정당한 테이블에 앉아 ‘어떤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다. 설령 가시적인 모습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슴 한편엔 다른 계산법을 가지며 앉아있지는 않았을까? 그 논의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민족을 두 팔로 안고라고 말했던 그들은 혹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리트머스지의 감별법 속에 살았는지도 모른다. 파란용지와 거의 구별이 가지 않은 붉음을 보이고 있어도, 내가 살아야하니까, 내 편이 붉다고 하니까 마음 한 구석 머뭇거림에도 불구하고 붉다고 말하며 ‘생존’했던 시대는 아니었을까? 물론 여전히 시대는 ‘생존’을 요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중화반응을 아는가? 학창시절 학교에서 배운 ‘중화반응’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산의 수소이온(H+)과 염기의 수산화 이온(OH-)이 반응하여 물과 염을 생산하는 반응 말이다. 산과 염기가 이온의 상태로 끊임없이 반응하는 상태. 혹은 물과 염과 중화열로 결론지어진다하더라도 말이다. 너는 빨강이다. 너는 파랑이다라는 신학적 리트머스지를 가지고 상대를 규정함으로 나를 세우려하지 말아보자. 이제 감별의 시대를 넘어서보자. 동일성의 허구적 폭력적 신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집, 오이쿠메네에 뛰어들어보자. 거기서 나와 네가 끊임없는 이온상태로 부유할지라도. 거기서 너와 내가 물이 되고 염이 되어 열이 나더라도 말이다. “사상의 시대, 이념의 모색을 기피하고 낡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사회철학의 빈곤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 스스로의 정신적 성숙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제 진보이건, 보수이건 양측 모두 오늘날 우리 현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누가 가장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들이 가장 절박한 처지에 몰려서 좌절하고 있는지를 봐야할 것이다.” 한종호, 위의 글, 57.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표준새번역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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