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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았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 속에서 한 가지 공통적인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다. 바로 ‘죽은 사람의 권리’란 것이다. 다른 말로는 죽음의 가치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시점에서 그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신은 전과는 다르지만 일정 부분 남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시신을 화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갖고 많은 다툼을 하기도 한다. 또는 어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쉽게 잊는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지탄받기도 한다. 왜 전자와 같은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 가능하고, 어떤 사람을 도덕적으로 꾸짖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바로 죽음에게 갖는 우리의 정서적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권리라는 것은 태어나는 시점에서 혹은 태어나기도 전의 시점부터 주장되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고 나서의 권리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경험한다면 어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죽은 사람과 다른 공감을 형성할 수는 있다. 어떤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와 내가 맺었던 관계는 이제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지금까지 맺었던 관계만이 남아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 남아있는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사람과의 추억이 될 수 있고, 많은 경우에는 아직은 남아 있는 그 사람의 육신이 될 수도 있다. 죽은 사람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의 문제는 남아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려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다분히 정서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적인 행위의 판단기준이 되는 것에 있어서 부당한 요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것이 도덕적 행위라고 인정받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공감이야말로 사람들을 도덕적 행위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고 실천하게끔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의 윤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지시했던 ‘강요의 윤리’였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억지로라도 생각하게끔 만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 생각할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라고 요구하는 그런 윤리 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죽음의 문제처럼 논리적으로는 아무리 충돌하여도 바람직한 윤리적 행위를 도출해내지 못 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윤리체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윤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체윤리 속에는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이란 것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윤리의 그릇을 넓히면서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의 윤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지시했던 ‘강요의 윤리’였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억지로라도 생각하게끔 만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 속에 생각할 기회는 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라고 요구하는 그런 윤리 말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죽음의 문제처럼 논리적으로는 아무리 충돌하여도 바람직한 윤리적 행위를 도출해내지 못 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윤리체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옳고 그른 것’을 가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윤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 대체윤리 속에는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이란 것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윤리의 그릇을 넓히면서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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