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지로서 역활을 담당하는 동안 고린도는 또다시 번영을 이루었다. 고린도는 해상 무역 및 발달된 예술과 산업을 통해서 거대한 수입을 얻었다. 고린도의 도기와 고린도산 놋쇄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포세이돈 신전에서 열린 이스드미안 경기의식은 헬라식 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A.D50 가을 즉 지식이 고로로 발달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직후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ㄹ한한 이 고린도시를 방문했던것 같다.사도바울이 A.D 50년에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총독 갈리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18:12절과 A.D52년 1월과 8월 사이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델피에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비문에 새겨진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에 대한 기록을 봄으로서 확증할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유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방 벽돌이 읽을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은 고린도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시장의 한가운데는 심판대 즉 재판석이 있었다. 그리고 아폴로 신전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를 볼수 있는 많은 신전과 사당외에 시의 북쪽과 서쪽에 두개의 극장이 세워져 있었다. A.D10세기 경까지 베마의 페허 위에 한 교회가 존재했었으나,베마의 상부구조에는 그 당시 벌써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시장 동편에 위치한 쥴리안 바실리카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는 성바울의 교회 라는 문자가 새겨져 아마도 베마의 페허위에 세워졌던 교회에서 나온듯 하다.
2) 신약시대의 고린도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 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이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B.C146년 뭄비우스 집정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소수의 신전들과 기둥들만이 남았다. 그때오 부터 1세기가 지난후에 항구와 군사기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쥴이어스 시이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이탈리아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자유민 이었다. 이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시는 매우 자유 분방하고 복합적이며, 신분이나 형식같은 것을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이런것은 본 서신에서도 볼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파 및 분쟁, 부도덕한 범죄 행위,은사의 오용등은 바로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성격이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고린도의 또 하나의 고유한 특성은 고린도의 귀족들,지배계급들은,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부유한 사람들, 즉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옛날의 명예로운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의식이나 훈련된 지성, 혹은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없었다. 무역은 아무런 창의력이나 도덕성을 키워주지 못한다.그것은 다만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사물을 자신의 상업적 사고로 대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고,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추구하고,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는 정신적 능력이나,도덕적 힘,영적 소망과 같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고린도의 상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가 하면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방탕함이 만연했으며,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으며,그 창녀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었다. 이도시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3) 고린도교회의 설립경위 및 상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겨우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린도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대하게 된 시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도중인 A.D50년 경이다. 그 당시 아덴으로 부터 이곳으로 왔던 바울은 처음에는 타락하고,부패한 이 도시의 죄악상을 목격하고,심히 두려워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것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훌륭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마게도냐로 파견 되었던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옴으로서 본격적으로 고린도의 복음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아 급기야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경위에 따라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좀차 여러가지 내외적인 문제와 신앙 윤리적인 논쟁으로 인해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 심각성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 도시의 주민들의 성격이나,환경에서 추측할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서와 고린도 후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추측할수 있다. 이 도시의 주민은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부류로 구성 되었다. 즉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하여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대도시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부터 이방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고린도 주민들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코 그리이스적인 특성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마도 유대인이 아닌 그리이스인 이었을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그리이스인들은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상상력이 풍부했고,쾌락을 즐겼으며,파당성을 띠는 드으이 특징을 지녀왔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포세이돈 신전에서 열린 이스드미안 경기의식은 헬라식 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A.D50 가을 즉 지식이 고로로 발달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직후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ㄹ한한 이 고린도시를 방문했던것 같다.사도바울이 A.D 50년에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총독 갈리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18:12절과 A.D52년 1월과 8월 사이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델피에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비문에 새겨진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에 대한 기록을 봄으로서 확증할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유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방 벽돌이 읽을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은 고린도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시장의 한가운데는 심판대 즉 재판석이 있었다. 그리고 아폴로 신전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를 볼수 있는 많은 신전과 사당외에 시의 북쪽과 서쪽에 두개의 극장이 세워져 있었다. A.D10세기 경까지 베마의 페허 위에 한 교회가 존재했었으나,베마의 상부구조에는 그 당시 벌써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시장 동편에 위치한 쥴리안 바실리카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는 성바울의 교회 라는 문자가 새겨져 아마도 베마의 페허위에 세워졌던 교회에서 나온듯 하다.
2) 신약시대의 고린도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 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이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B.C146년 뭄비우스 집정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소수의 신전들과 기둥들만이 남았다. 그때오 부터 1세기가 지난후에 항구와 군사기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쥴이어스 시이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이탈리아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자유민 이었다. 이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시는 매우 자유 분방하고 복합적이며, 신분이나 형식같은 것을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이런것은 본 서신에서도 볼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파 및 분쟁, 부도덕한 범죄 행위,은사의 오용등은 바로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성격이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고린도의 또 하나의 고유한 특성은 고린도의 귀족들,지배계급들은,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부유한 사람들, 즉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옛날의 명예로운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의식이나 훈련된 지성, 혹은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없었다. 무역은 아무런 창의력이나 도덕성을 키워주지 못한다.그것은 다만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사물을 자신의 상업적 사고로 대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고,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추구하고,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는 정신적 능력이나,도덕적 힘,영적 소망과 같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고린도의 상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가 하면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방탕함이 만연했으며,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으며,그 창녀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었다. 이도시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3) 고린도교회의 설립경위 및 상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겨우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린도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대하게 된 시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도중인 A.D50년 경이다. 그 당시 아덴으로 부터 이곳으로 왔던 바울은 처음에는 타락하고,부패한 이 도시의 죄악상을 목격하고,심히 두려워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것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훌륭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마게도냐로 파견 되었던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옴으로서 본격적으로 고린도의 복음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아 급기야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경위에 따라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좀차 여러가지 내외적인 문제와 신앙 윤리적인 논쟁으로 인해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 심각성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 도시의 주민들의 성격이나,환경에서 추측할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서와 고린도 후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추측할수 있다. 이 도시의 주민은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부류로 구성 되었다. 즉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하여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대도시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부터 이방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고린도 주민들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코 그리이스적인 특성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마도 유대인이 아닌 그리이스인 이었을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그리이스인들은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상상력이 풍부했고,쾌락을 즐겼으며,파당성을 띠는 드으이 특징을 지녀왔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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