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이해 - 고산 윤선도 그리고 나의 제3의 고향 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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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문학의 이해 - 고산 윤선도 그리고 나의 제3의 고향 해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고산 윤선도의 생애

2. 작품분석
1) 어부사시사
2) 견회요
3) 산중신곡

3. 문학사적 의미 및 문학사상
1) 문학사적 의미
2) 문학사상

4. 고택과 시비

5. 평가

Ⅲ. 결론

Ⅳ. 느낀 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그 패트론들은 틀림없이 많은 학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널따란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맹상군도 3000식객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그 저택은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궁금하다. 맹상군도 장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 많은 식객을 수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윤선도 고택 뒤로 조성된 9000평의 비자나무숲을 산책하면서 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 정도 장원이 있다면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하므로, 굳이 서울에 올라가서 아등바등 벼슬살이에 집착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사실 조선시대의 벼슬, 그건 상당히 골치아픈 직업이었다. 자칫하면 당쟁과 모략의 그물에 걸려 제명에 못살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소요유(逍遙遊)의 쾌감(快感)을 알아버린 사람은 결코 조직사회의 속박에 묶이지 않는다. 고향의 순채나물과 농어회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눈에 불을 켜고 벼슬에 집착하지 않을 것 같다.
강진 일대에 흩어져 살던 윤씨들이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에 들어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초반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1476∼1543년)에 의해서다.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의 호를 가졌던 윤효정. 그러나 후손들이 실제 고기나 잡고 땔나무나 하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이후로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내리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면서 부와 명예를 갖춘 명문가로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러다가 고산 윤선도 대에 와서 은둔이 시작된다. 정치적으로 남인 계보에 속해 있던 고산은 당쟁의 와중에서 노론인 송시열에게 밀리면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해남으로 귀거래사한 것이다.
그러나 고산의 귀거래사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처럼 생활고에 시달려야 하는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벼슬살이라고 하는 사회적 욕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자연적 욕구인 소요(逍遙)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는 보길도에다 낙서재와 동천석실, 세연정을 지어놓고 신선놀음을 하였는가 하면, 해남 연동의 종택을 증축한다. 윤선도는 고향에 돌아와 ‘귀거래사’ 대신 국문학상 유명한 한글가사인 ‘어부사시사’를 남긴다.
‘취하여 누웠다가 여울 아래 내려가려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떨어진 꽃잎이 흘러오니 선경이 가깝도다/ 찌거덩 찌거덩/ 인간의 붉은 티끌 얼마나 가렸느냐’(윤선도, 어부사시사 봄노래)
윤선도의 예술혼은 그의 증손인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년)가 이어받는다. 윤두서야말로 실제 이 집에서 거주한 주인이다. 이 집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애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으니까.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비(詩碑) 및 생가의 터>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詩)가 실려 있는 시비(詩碑)가 전국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 마을
시 명 : 어부사시사
소재지 : 전남 완도군 보길도 부용동
시 명 : 어부사시사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마로니에공원
시 명 : 오우가
설 명 : 1991년 문화부에서 11월의 문화인물로 고산윤선도선생을 선정하여 [고산윤선도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비에는 오우가를 새기고 측면에는 \'고산 윤선도 생가의 터\'라고 새겼고, 다른 측면에는 수석송죽월을 양각하였으며, 평보 서희환의 글씨에 강창균이 조각을 하였다
5. 평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했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됐다.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의 세계관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조상이 물려준 유산을 토대로 풍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Ⅲ. 결론
고산 윤선도 선생은 자연을 자신의 이웃삼아 가까이 대하고 애정적인 시각으로 그러한 것들을 바라볼 줄 알았다는 점이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시조라는 문학형식으로 창작하여 후세 사람들까지도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Ⅳ. 느낀 점
그동안 지인들의 방문에 해남관광 순위권 내에 항상 놓았던 곳이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이었다. 첫 해는 유심히 그래도 꼼꼼하게 들여다 보았던 곳들이 해가 갈수록 형식적으로 둘러보는 코스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사실은 보았던 내용들이 거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비자나무 군락지를 오르던 그 길목들, 여러 명이서 팔을 펴 재 보았던 고택 앞 은행나무, 자손들이 아직 살고 있으니 조용히 하라고 써붙여놓은 녹우당 안채의 팻말 등이 여전히 생각나지만 여기저기 설명을 붙여놓은 조그마한 전시관 내의 글자들은 이미 기억 너머 어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 과제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해남에 이런 멋진 곳이 있다는 것이 어깨를 으쓱거릴 만큼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늘 갈 때마다 느꼈던 변함없는 단조로움이 사람들의 관심을 더 오래 붙잡기 힘들다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고산의 문학정신과 그 의의\", 해남문화원 주최 세미나 발표, 1996. 및 \"고산시가의 도교철학적 조명\", 겨레시 운동본부 주최, 제4회 겨레시 세미나 발표, 1991. 11.
김일광(2007). 윤선도. 파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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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14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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