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건’도 2연대가 자행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무장대에게도 피해를 입었는데,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었다. 이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라산에 잔존한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으며, 1950년 7월 25일 중문면 하원리를 습격하여 민가 99동을 불태운 것을 위시하여 간헐적으로 지서나 마을을 습격하여 경찰에 피해를 입히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며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인한 사상자, 귀순공작으로 인한 귀순자가 발생하였으나 계속해서 20세 전후의 젊은이를 납치하여 충원함으로써 1951년 3월에 64명, 1952년 5월에는 65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2년 10월 말에서 1953년 11월 말까지의 진압작전으로 무장대의 잔여인원은 11명으로 줄어들었고, 1954년 2월 13일에는 5명이 잔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여기까지가 4.3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이 추진되었으나 아직까지 미신고 또는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4.3보고서에서도 상당 부분 가해 주체인 군인과 경찰과 같은 가해 세력을 정확히 명시하고 있지 않아서 지금도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 굉장히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4.3사건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기록될 만큼 그 피해 규모가 커서 제주도민이 25000에서 30000명가량 희생되었고 본인이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정신적으로, 주위 사람의 아픔으로 인해 거의 모든 주민이 4.3의 아픔을 겪었다고 할 수 있는 제주의 ‘한’으로 남아있다.
그러한 사건이 종결된 지 70년도 채 되지 않아 당시의 피해자가 아직도 살아있고 그때의 기억으로, 상처로 아픔을 겪고 있는 이때 정부가 이 사건을 좌시하지 않고 도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데 적극적으로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이며 이에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참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 또한 이 사건을 마음 깊이 새겨서 잊지 않고 진심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국가권력에 부당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었고,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을 병행하여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었다. 이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처형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는데, 그 숫자는 약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한라산에 잔존한 무장대는 60여 명이었으며, 1950년 7월 25일 중문면 하원리를 습격하여 민가 99동을 불태운 것을 위시하여 간헐적으로 지서나 마을을 습격하여 경찰에 피해를 입히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며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인한 사상자, 귀순공작으로 인한 귀순자가 발생하였으나 계속해서 20세 전후의 젊은이를 납치하여 충원함으로써 1951년 3월에 64명, 1952년 5월에는 65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52년 10월 말에서 1953년 11월 말까지의 진압작전으로 무장대의 잔여인원은 11명으로 줄어들었고, 1954년 2월 13일에는 5명이 잔존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여기까지가 4.3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후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이 추진되었으나 아직까지 미신고 또는 미확인 희생자가 있어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며, 4.3보고서에서도 상당 부분 가해 주체인 군인과 경찰과 같은 가해 세력을 정확히 명시하고 있지 않아서 지금도 비극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아 굉장히 유감이라고 생각했다.
4.3사건은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기록될 만큼 그 피해 규모가 커서 제주도민이 25000에서 30000명가량 희생되었고 본인이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았더라도 정신적으로, 주위 사람의 아픔으로 인해 거의 모든 주민이 4.3의 아픔을 겪었다고 할 수 있는 제주의 ‘한’으로 남아있다.
그러한 사건이 종결된 지 70년도 채 되지 않아 당시의 피해자가 아직도 살아있고 그때의 기억으로, 상처로 아픔을 겪고 있는 이때 정부가 이 사건을 좌시하지 않고 도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데 적극적으로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이며 이에 그치지 않고 이와 같은 참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 또한 이 사건을 마음 깊이 새겨서 잊지 않고 진심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국가권력에 부당함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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