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론
[2]본론
1.백록담/정지용
2.남신의주 유동박시 봉방/백석
3.무등을 보며/서정주
4.사랑의 변주곡/김수영
5.눈물/김춘수
6.겨울의 꿈/조재훈
7.중심의 괴로움/김지하
[3]결론
[2]본론
1.백록담/정지용
2.남신의주 유동박시 봉방/백석
3.무등을 보며/서정주
4.사랑의 변주곡/김수영
5.눈물/김춘수
6.겨울의 꿈/조재훈
7.중심의 괴로움/김지하
[3]결론
본문내용
작들이 다시 간행되었고, 이무렵을 전후해 최제우(최제우)최시형(최시형)강일순(강일순)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이때 변혁운동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시집으로 <애린><검은 산 하얀 방>과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이 가문 날에 비구름>, 서정시집<별밭을 우러르며>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남>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간행한 뒤, 1998년에는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 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명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로, 복역 중이던 1975년에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고, 1981년에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위의 저서 외에 시집으로 <꽃과 그늘>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예감에 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등이 있다.
(2) 시분석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 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3) 당시 시문학적 분석
인간과 자연이 파괴적인 착취 상태에서 해방되고, 문명과 기술의 성과가 전혀 다르게 이용되며, 생태학적 순환 속에서 편입되는 것을 배우는 그러한 미래의 사회를 생태시나 환경시가 지향하는 사회이다. 여기서 환경시를 정의 내리면 파괴되어가는 자연의 실상을 기록 내지 고발하거나 더 나아가 환경 파괴가 경제적, 사회적, 이념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 필연적으로 나타난 생태학적 귀결을 성찰하고 강조하는 시를 환경시 내지 생태시이다.
(4) 시에 담긴 메시지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더욱이 그 시작이 한 세기도 아닌 밀레니엄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즐거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란 즐거움 그 자체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움이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즐거움도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 제일 괴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식과 실천의 장, 그 장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중심에 서지 못할 때 새로운 시작은 온전한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이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곧 치열함인 것이다. 일찍이 김수영이 말했던 \'온몸의 시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존재 전체를 뒤흔들 괴로움이 있고서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이 논리는 밀레니엄을 전망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인 것이다. 중심의 괴로움을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알아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꿈꾸는 디지털적인 것과 에코적인 것의 통합을 통한 유토피아는 온전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3] 결론
위 시 일곱 편에서는 작가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조사를 하면서 시가 지닌 세 가지 엄청난 스킬(Skill)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유용하고도 편리한 기술이다.
①시는 우회적인 표현
이것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저항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작가 한용운을 보자. 일제시대 대부분의 작가가 그랬듯이 한용운씨도 조국광복이라든가 독립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씨는 “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화자 당사자는 의도적인 사용이 아니라 시 특성상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적 표현의 덕을 봐서 일제의 압박의 화살에서도 빗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②인간심리의 복합적 성향을 효과적으로 표현
사람의 심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시는 이러한 복합적인 사람의 심리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물론 여기에는 위 ①에서 설명한 우회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우회적인 표현 사용으로 읽는 자로 하여금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시인이 읽는 사람에게 자의적인 해석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시에 쓰여있는 글씨가 아닌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알았을 때 읽는 사람은 시인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③함축표현
백 마디 잡설보다 주옥같은 한마디 단어가 낫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다(-_-). 아무튼 위에 말처럼 주저리주저리 만연하게 글을 늘어뜨리는 것보다 한 두 마디 단어가 이해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예전에 이러한 시를 본적이 있다
제목 : 뱀
너무 길다
<출처 : 중학시절 국어교사 채선생님 수업>
참으로 간결하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서 책 한 권 분량이 넘을 수도 있다. 이렇듯 시어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무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함축표현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우회적인 표현처럼 애매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가 가진 하나의 강점으로써 시를 통한 의사소통의 특징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시는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써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때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을 시가 가진 하나의 강점이라 생각하고 시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시에 담긴 진정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할 때 그 시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990년대에는 1970년대의 활기에 찬 저항시와는 달리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인 예이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하였고, 1994년 <대설, 남>과 시집 <중심의 괴로움>을 간행한 뒤, 1998년에는 율려학회를 발족해 율려 사상과 신인간운동을 주창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민족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0년대 내내 민족문학의 상징이자 유신 독재에 대한 저항운동의 중심으로서 도피와 유랑, 투옥과 고문, 사형선고와 무기징역, 사명과 석방 등 형극의 길을 걸어온 작가로, 복역 중이던 1975년에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고, 1981년에 세계시인대회로부터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위의 저서 외에 시집으로 <꽃과 그늘>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생명> <율려란 무엇인가> <예감에 찬 숲 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등이 있다.
(2) 시분석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 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3) 당시 시문학적 분석
인간과 자연이 파괴적인 착취 상태에서 해방되고, 문명과 기술의 성과가 전혀 다르게 이용되며, 생태학적 순환 속에서 편입되는 것을 배우는 그러한 미래의 사회를 생태시나 환경시가 지향하는 사회이다. 여기서 환경시를 정의 내리면 파괴되어가는 자연의 실상을 기록 내지 고발하거나 더 나아가 환경 파괴가 경제적, 사회적, 이념적으로 조건지어져 있다는 사실과 그 결과 필연적으로 나타난 생태학적 귀결을 성찰하고 강조하는 시를 환경시 내지 생태시이다.
(4) 시에 담긴 메시지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더욱이 그 시작이 한 세기도 아닌 밀레니엄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그 즐거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클 것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란 즐거움 그 자체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움이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즐거움도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 제일 괴로운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식과 실천의 장, 그 장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 중심에 서지 못할 때 새로운 시작은 온전한 꽃을 피울 수 없는 것이다.
중심에 선다는 것은 곧 치열함인 것이다. 일찍이 김수영이 말했던 \'온몸의 시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할 수 있다. \'나\'의 모든 존재 전체를 뒤흔들 괴로움이 있고서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이 논리는 밀레니엄을 전망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인 것이다. 중심의 괴로움을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알아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꿈꾸는 디지털적인 것과 에코적인 것의 통합을 통한 유토피아는 온전히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3] 결론
위 시 일곱 편에서는 작가 모두가 각자의 상황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조사를 하면서 시가 지닌 세 가지 엄청난 스킬(Skill)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유용하고도 편리한 기술이다.
①시는 우회적인 표현
이것은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직설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쓰여진 저항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작가 한용운을 보자. 일제시대 대부분의 작가가 그랬듯이 한용운씨도 조국광복이라든가 독립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씨는 “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화자 당사자는 의도적인 사용이 아니라 시 특성상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시적 표현의 덕을 봐서 일제의 압박의 화살에서도 빗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②인간심리의 복합적 성향을 효과적으로 표현
사람의 심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시는 이러한 복합적인 사람의 심리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물론 여기에는 위 ①에서 설명한 우회적인 표현이 사용된다. 우회적인 표현 사용으로 읽는 자로 하여금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시인이 읽는 사람에게 자의적인 해석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시에 쓰여있는 글씨가 아닌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알았을 때 읽는 사람은 시인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③함축표현
백 마디 잡설보다 주옥같은 한마디 단어가 낫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다(-_-). 아무튼 위에 말처럼 주저리주저리 만연하게 글을 늘어뜨리는 것보다 한 두 마디 단어가 이해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예전에 이러한 시를 본적이 있다
제목 : 뱀
너무 길다
<출처 : 중학시절 국어교사 채선생님 수업>
참으로 간결하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서 책 한 권 분량이 넘을 수도 있다. 이렇듯 시어에 담긴 의미는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무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함축표현이 의사소통을 하는데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에서 말한 우회적인 표현처럼 애매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가 가진 하나의 강점으로써 시를 통한 의사소통의 특징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시는 의사소통의 한 수단으로써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때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써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을 시가 가진 하나의 강점이라 생각하고 시인의 심정을 이해하면서 시에 담긴 진정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할 때 그 시인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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