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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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직신학 신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유신론
Ⅲ. 무신론
Ⅳ. 삼위일체론
Ⅴ. 하나님의 속성
Ⅵ. 나가는 말

본문내용

는 개념을 설명한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은 삼위 하나님의 순환과 상호 내주 속에 신적인 인격들의 상호 표출이 발생하며 이것이 신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둘째, 몰트만은 하나님의 창조를 ‘영광의 나라’로 표현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소통과 사랑의 사귐을 통해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면 그분의 창조 또한 영광을 위한 창조로 바라보았다. 몰트만에게 창조의 목적은 안전성의 회복이나 원상태로의 회귀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에 있다.
셋째, 예수의 영광이다. 부활한 예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된 십자가에 달린 영광이다. 따라서 부활절은 죽음과 죄에서 해방된 자유와 기쁨의 날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광은 부활에서 놀이와 축제의 특징을 입는다. 창조의 놀이는 부활절부터 고난을 극복하여 기쁨에 축제에 참여하는 “놀이의 신학”(theologia ludens)이 된다.
넷째, 하나님의 종말론적 영광이다.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시작하여 영광으로 끝난다. 몰트만에게 영광은 하나님의 충만함과 영원한 기쁨의 잔치이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의 현재적 형태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발타자르와 함께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의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는다.
바르트, 발타자르,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에서 미의 신학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성을 통해, 발타자르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몰트만은 창조의 역사 안에서 아름다움의 신학을 전개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영광은 즉 아름다움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삼위일체과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다. 발타자르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미학적 범주로 말하는 시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에서 신학적 미학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발타자르의 영광의 신학의 근거는 십자가 신학이며 십자가 신학의 목표는 영광의 신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발타자르의 신학은 새로운 의미의 십자가 신학이다.
Ⅵ. 나가는 말
지금까지 유신론과 무신론, 삼위일체의 영광의 하나님까지 알아보았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유신론의 완성이고, 무신론의 표면적인 지적을 포용하며 발전한다.
먼저 유신론과 삼위일체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기독교 신앙이 범재신론과 유사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바르트의 표현으로 하나님은 사랑이고 자유이시기 때문에 세상에 내재하기도 하시고, 세상을 초월해 계시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철학적 유신론은 삼위일체 신관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신론과 범신론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한 부분으로만 치우치게 하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삼위일체론과는 맞지 않는다. 삼위 하나님은 내재성과 초월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형성을 살펴볼 때에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었다. 기독교 신관은 하나님을 단순히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신관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만을 나타내면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알아가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어느 철학적 신관이나 기독교 신관도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 정리하는 행위에서부터 이미 신관의 한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조직신학의 시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관과 비슷하다는 범재신론이나, 기독교 신관인 삼위일체론이나 모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체험되어지는 하나님을 글로 충분히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마치 매우 아름다워서 그 이상 표현할 단어가 없다고 할 만큼 인간의 이성으로는 부분적인 표현밖에 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마치 몰트만이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고 느끼고 관계하는 것이 진정한 만남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관인 삼위일체론의 설정과 설명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삼위일체론 속에 공통적인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부의 모습이라도 더 찾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양태론적 시선을 이단으로 보는 시선에 대해 반박하고자 한다. 양태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양태론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신학자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던 양태론의 모습은 하나님의 가면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즉 위격이 나타난 가면은 하나님의 참 본질을 가리고, 하나님의 인격적인 관계와 실재를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면을 바꿔서 쓴다는 표현은 이미 하나님을 인간화하여 생각한다는 한계를 포함하고 있다. 가면에 의해 하나님의 내적 본질이 가려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한 몸(마음)을 가지고 계시는 세 얼굴(위격)을 가지신 분으로 상상해야 할 것 이다. 이러한 상상한 괴상한 하나님의 형상을 떠올리게 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형상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이 적합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점은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모습을 모두 나타낼 수 있고, 각각 위격을 상호 내재와 관계를 하나의 마음으로 관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방식 역시 인간의 유한한 언어와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을 통해 체험되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가진 삼위 하나님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삼위일체는 자유하신 성부하나님, 사랑이신 성자하나님, 자유와 사랑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성령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삼위 하나님 각 인격들의 관계로만 완성되지 않고,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까지 이어질 때에 완성된다.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표현되며 그와 동시에 인간도 아름다움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헨델의 메시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삼위 하나님의 밝고 온화한 분위기와 그 분위기에 싸인 인간의 솟구쳐 오르는 흥분과 열광, 또 부활을 느낄 수 있는 밝은 빛으로 충만한 느낌을 삼위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과 관계하며 실현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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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7.30
  • 저작시기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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