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며..
1장, 돌아온 탕자, 돌탕
내인생은 나의것? (눅15:11-13)
다 없애기 까지..(눅15:1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회개입니다.
아버지 품에서의 진정한 회복
2장, 집에 있는 탕자, 집탕
사랑없이 수고한 자의 생색과 분노
돌탕과 집탕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3장. 아버지 품으로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로잡혀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중심 잡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살아나고, 살려야 합니다.
마치며..
1장, 돌아온 탕자, 돌탕
내인생은 나의것? (눅15:11-13)
다 없애기 까지..(눅15:1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회개입니다.
아버지 품에서의 진정한 회복
2장, 집에 있는 탕자, 집탕
사랑없이 수고한 자의 생색과 분노
돌탕과 집탕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3장. 아버지 품으로
하염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사로잡혀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중심 잡는 그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살아나고, 살려야 합니다.
마치며..
본문내용
수 있습니다. 자기 일을 스스로 열심히 하니, 그는 열심히 살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재산도 많으니 아쉬운 소리 하거나 들을 일도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보는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은 사람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쉴 때 잘 쉬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진정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종에게 묻습니다(눅15:26). 아버지는 상관이고, 자기는 종이라고 생각(29절)하니,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성실한 사람인데, 교회에 계속와도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가 좌우명인 이 맏아들의 물음에 종이 대답합니다(눅15:27).
동생이 돌아왔어도 맏아들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가족 구원에 관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맏아들처럼 가족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도 관심 없고, 구원 받고 돌아와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면, 과연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안 믿는 식구들을 보면서도 애통함이 없다면, 내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근심은 자기 근심이 아닙니다. 좋은집, 좋은 환경, 병이 낫기를 구하는 육적인 근심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서 조바심 내는 야망의 고통도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바로 가족과 민족의 구원이었습니다(롬9:1-3).
바울은 20년 가까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골육이자 형제인 유대인의 회당부터 찾아갔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 중 이방인들은 믿고 돌아오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나로 인해 많은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가족은 예수께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하면서 자기 동족에 대한 근심이 있었듯,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내 식구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 지금은 공부하고, 나중에 교회 나가. 그냥 잘 살다가 나중에 믿으면되지”
이런 말을 하는 부모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급하고 절박함으로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없이 수고한 자의 생색과 분노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이 기쁜 이야기에 노했습니다(눅15:28). 분노가 쌓이면, 스스로를 갉아먹고, 관계를 파괴하며, 결국 다 망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원어로 ‘둘리오’인데, 맏아들이 자식으로써가 아니라 종으로써 아버지를 섬겼다는 표현입니다(눅15:29). 그런식으로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바라는 것이 염소새끼입니다. 아버지를 ‘look’했다는 것은 ‘이봐요’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나가서 아버지의 재산 8/9가 자기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력, 봉사, 근면, 충성의 열을 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전에는 기쁨 충만인데, 지금은 분노 충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3-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앞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어 설교하십니다(눅16:13-15). 돈을 좋아하면 주님의 말씀을 비웃게 되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맏아들이 아버지 마음을 모르고,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못한 것은 돈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돌탕과 집탕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듭니다(눅15:30). 동생이라고도 안하고, ‘이 아들’의 원어를 보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놈, 저놈보다 더 나쁜 욕으로, 관계를 거절하는 말입니다. 맏아들에게는 둘째에게 없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실상은 의로운 교만이 있어서,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오직 자신을 몰라주는 불공평한 늙은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둘다 똑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맏아들이 구원 받을 것같지만, 정작 구원 받은 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문제 많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없는 삶의 구체적인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남의 눈치만 살피고, 싫다는 소리를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쓰고, 참고 또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피해의
성령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쉴 때 잘 쉬고, 일할 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진정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종에게 묻습니다(눅15:26). 아버지는 상관이고, 자기는 종이라고 생각(29절)하니,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성실한 사람인데, 교회에 계속와도 지속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가 좌우명인 이 맏아들의 물음에 종이 대답합니다(눅15:27).
동생이 돌아왔어도 맏아들은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가족 구원에 관심이 하나도 없습니다. 맏아들처럼 가족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도 관심 없고, 구원 받고 돌아와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면, 과연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안 믿는 식구들을 보면서도 애통함이 없다면, 내 구원의 확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근심은 자기 근심이 아닙니다. 좋은집, 좋은 환경, 병이 낫기를 구하는 육적인 근심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서 조바심 내는 야망의 고통도 아닙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바로 가족과 민족의 구원이었습니다(롬9:1-3).
바울은 20년 가까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골육이자 형제인 유대인의 회당부터 찾아갔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 중 이방인들은 믿고 돌아오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나로 인해 많은 구원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가족은 예수께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하면서 자기 동족에 대한 근심이 있었듯,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내 식구의 구원을 위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괜찮아. 지금은 공부하고, 나중에 교회 나가. 그냥 잘 살다가 나중에 믿으면되지”
이런 말을 하는 부모가 한 둘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급하고 절박함으로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없이 수고한 자의 생색과 분노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맏아들은 이 기쁜 이야기에 노했습니다(눅15:28). 분노가 쌓이면, 스스로를 갉아먹고, 관계를 파괴하며, 결국 다 망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원어로 ‘둘리오’인데, 맏아들이 자식으로써가 아니라 종으로써 아버지를 섬겼다는 표현입니다(눅15:29). 그런식으로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바라는 것이 염소새끼입니다. 아버지를 ‘look’했다는 것은 ‘이봐요’했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둘째 아들이 나가서 아버지의 재산 8/9가 자기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력, 봉사, 근면, 충성의 열을 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전에는 기쁨 충만인데, 지금은 분노 충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3-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앞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어 설교하십니다(눅16:13-15). 돈을 좋아하면 주님의 말씀을 비웃게 되고,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맏아들이 아버지 마음을 모르고, 동생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못한 것은 돈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돌탕과 집탕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듭니다(눅15:30). 동생이라고도 안하고, ‘이 아들’의 원어를 보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놈, 저놈보다 더 나쁜 욕으로, 관계를 거절하는 말입니다. 맏아들에게는 둘째에게 없는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습니다. 실상은 의로운 교만이 있어서,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오직 자신을 몰라주는 불공평한 늙은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둘다 똑같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맏아들이 구원 받을 것같지만, 정작 구원 받은 아들은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문제 많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자기가 없는 삶의 구체적인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남의 눈치만 살피고, 싫다는 소리를 못하고,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쓰고, 참고 또 참고, 하고 싶은 일이 없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피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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