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종교 개혁사 개관
Ⅱ. 종교 개혁 시대 (1517-1648)
Ⅲ. 종교 개혁사 ( 인물중심 )
Ⅱ. 종교 개혁 시대 (1517-1648)
Ⅲ. 종교 개혁사 ( 인물중심 )
본문내용
있게 된 그는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1533년에 오를
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 채 파리
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벵은 파리에서 상
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벵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
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
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
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
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벵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
뒤 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
1533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 달
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벵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
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
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534년 가을 사건 하나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떠
나게 했다. 이 위험을 피하여 칼벵은 바젤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그는 1년도 채
안돼서 [기독교 강요]를 썼고, 1536년 앞에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변증적 서간문
을 달아 출판했다.
[강요]의 인쇄 교정을 끝낸 칼벵은 이탈리아로 갔다가 잠시 머문 뒤, 바젤로 돌
아와서 이내 프랑스로 출발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
나게 된다. 그의 계획은 스트라스부르에 자리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파리를 떠나 쥬네브를 거쳐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쥬
네브에 도착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기옴 파렐은 이곳에 남아 자기를 도와 종교 개
혁을 공고히 하자고 그를 독촉했던 것이다.
2. 칼벵과 쥬네브 종교 개혁
제네바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무렵, 복음
주의 사상은 그들 가운데 점차 퍼져 나갔다.
칼벴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 붙들려 그로부터 \"성경 강사\"의 직무를 맡았다.
칼벴은 대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였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쥬네브 교회를
서둘러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렐과 협력하여 4개 [조항]을 작성한 뒤 시의
회에 맡겼다. 그리고 [쥬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육서와 신앙고백]을 작성했
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쥬네브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 서명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강한 저항을 야기시켰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
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벵과 그의 동료들이 신앙고백
에 반대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의회는 성
찬이 누구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속권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게 했다. 또한 시의회가 그 권한을 넘어서서 베른의 의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자들은 맹렬히 반대하면서 1538년 부활절에 강단에 올라 설교
는 하되, 성찬 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국은 칼벵과 파렐과 코로를 면직시
키고, 3일 안으로 쥬네브를 떠나라고 처분을 내렸다.
칼벵은 바젤에 정착할 생각을 했지만 부쳐의 절박한 부름에 계획을 바꾸었다.
1538년 9월, 그는 종교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해 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
를 책임졌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많은 것
을 배웠으며, 프랑스 교회 목사의 직책 외에도, 교수로서 그리고 문학방면 등에서
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로마서 주석]을 내놓았고, [사돌레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고 [성만찬 소고]를 썼다.
칼벵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쥬네브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시련을
당했다. 추방된 개혁자들의 지지세력인 기에르멩들에게 호의적인 선거가 치뤄지
고, 그에 따라 쥬네브 당국은 칼벵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했다. 칼벵은 쥬네브인들
의 간청이 점점 더 절박해지자, 그는 결국 1541년 9월 교회의 다소간 질서를 회
복하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 의도로 쥬네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3년의 사역을 마치고 생애를 끝내야 했다.
쥬네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벵은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1541년
11월에 [교회법]이란 이름으로 시당국이 채택한 치리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교회 안에 44가지 직분을 구분했다. 1542년에는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였고, 많은 요소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빌어온 예배 모범서인 [교회의 기도
와 찬송의 형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기초가 놓여지자, 칼벵은 \"도시-교회\"로 만들기 위해 험난
한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반동을 야기시켰고 더 나아가
1546년부터 기에르멩파의 우두머리인 페랭과 등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1548년
선거에서 페래의 지지자들이 승리하여 7년 동안 이들은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점유하여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칼벵이 교회 치리에 대해 가졌던 매우 엄격한 개념이 많은 원한을 사게 했다
면, 복음 진리를 옹호하려는 그의 의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적을 만들었다.
1543년 애가서의 정경성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문제시한 세바스티앙 카
스텔리용을 나무랐다. 8년 뒤, 예정론 교리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죄
의 조성자라고 비난한 제롬 볼섹의 공격과 맞서야 했다. 1533년에는 삼위일체 교
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교리
들을 쥬네브에서 제거한 뒤, 외부의 적과도 논쟁을 하였다.
쥬네브는 개혁파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에 광채를 던지는 영적
인 모국이었다.
레앙 대학에서 법학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법학을 완전히 내버리지 않은 채 파리
에 세운 왕실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준비해
1532년에 출판함으로 일약 인문주의자들 가운데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법학공부를 끝내러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1533년에 돌아온 칼벵은 파리에서 상
황이 성경파들에게 호의롭게 된 것을 보았다. 칼벵의 친구로서 대학의 새 총장이
된 인문주의자 니콜라콥은 1533년 만성절, 개학식에 총장 훈시 시간에 8복 설교
를 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에라스부스와 루터에게서 열감을 받아, 종교개혁의
귀중한 테마들 특히 믿음으로 얻는 칭의 테마에 접근했다. 의회는 대학 총장을
기소하자 콥은 외국으로 도망했고, 칼벵도 위협을 느끼고 친구이며 신부인 루이
뒤 티에가 사는 앙굴렘으로 피신했다.
1533년 적어도 에라스무스적 쇄신주의의 일원이었던 그가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된 시기를 그가 성직록을 포기하기 위해 1534년 봄에 노아용을 방문하기 전 몇 달
기간으로 위치한다고 본다.
노아용에서 돌아와, 이미 복음주의사상에 사로잡힌 칼벵은 여러 곳에서 머물렀
는데 특히 오를레앙에서 자신의 최초의 신학 작품인 [영혼의 수면]을 써서 재세
례파들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534년 가을 사건 하나가 그로 하여금 프랑스를 떠
나게 했다. 이 위험을 피하여 칼벵은 바젤로 도망했다. 그곳에서 그는 1년도 채
안돼서 [기독교 강요]를 썼고, 1536년 앞에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변증적 서간문
을 달아 출판했다.
[강요]의 인쇄 교정을 끝낸 칼벵은 이탈리아로 갔다가 잠시 머문 뒤, 바젤로 돌
아와서 이내 프랑스로 출발하여 재산을 다 정리하고 결정적으로 망명의 길을 떠
나게 된다. 그의 계획은 스트라스부르에 자리 잡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파리를 떠나 쥬네브를 거쳐 우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1536년 7월 쥬
네브에 도착했고 그러기가 무섭게 기옴 파렐은 이곳에 남아 자기를 도와 종교 개
혁을 공고히 하자고 그를 독촉했던 것이다.
2. 칼벵과 쥬네브 종교 개혁
제네바인들이 그들의 독립을 보존하고 확립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무렵, 복음
주의 사상은 그들 가운데 점차 퍼져 나갔다.
칼벴은 파렐에 의해 쥬네브에 붙들려 그로부터 \"성경 강사\"의 직무를 맡았다.
칼벴은 대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였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쥬네브 교회를
서둘러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렐과 협력하여 4개 [조항]을 작성한 뒤 시의
회에 맡겼다. 그리고 [쥬네브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육서와 신앙고백]을 작성했
고, 파렐과 함께 21개 조항으로 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모든 쥬네브 시민들로
하여금 각자 서명하게 하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강한 저항을 야기시켰다. 1538년 시 당국과 개혁자들 사이에 잠
재해 있던 갈등은 첨예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칼벵과 그의 동료들이 신앙고백
에 반대하는 자들을 성찬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의회는 성
찬이 누구에게도 거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속권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게 했다. 또한 시의회가 그 권한을 넘어서서 베른의 의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을 때, 개혁자들은 맹렬히 반대하면서 1538년 부활절에 강단에 올라 설교
는 하되, 성찬 거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국은 칼벵과 파렐과 코로를 면직시
키고, 3일 안으로 쥬네브를 떠나라고 처분을 내렸다.
칼벵은 바젤에 정착할 생각을 했지만 부쳐의 절박한 부름에 계획을 바꾸었다.
1538년 9월, 그는 종교의 이유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해 온 프랑스인들의 공동체
를 책임졌다. 이곳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많은 것
을 배웠으며, 프랑스 교회 목사의 직책 외에도, 교수로서 그리고 문학방면 등에서
도 자신의 역량을 보여줬다. 그는 [로마서 주석]을 내놓았고, [사돌레에게 주는
편지]를 작성했고 [성만찬 소고]를 썼다.
칼벵이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는 동안, 쥬네브 교회는 심각한 분쟁으로 시련을
당했다. 추방된 개혁자들의 지지세력인 기에르멩들에게 호의적인 선거가 치뤄지
고, 그에 따라 쥬네브 당국은 칼벵을 다시 부르기로 결정했다. 칼벵은 쥬네브인들
의 간청이 점점 더 절박해지자, 그는 결국 1541년 9월 교회의 다소간 질서를 회
복하기에 필요한 시간만 머물 의도로 쥬네브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23년의 사역을 마치고 생애를 끝내야 했다.
쥬네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칼벵은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1541년
11월에 [교회법]이란 이름으로 시당국이 채택한 치리서를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교회 안에 44가지 직분을 구분했다. 1542년에는 문답형식으로 된 [신앙교육서]를
작성하였고, 많은 요소를 스트라스부르에서 빌어온 예배 모범서인 [교회의 기도
와 찬송의 형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종교개혁의 기초가 놓여지자, 칼벵은 \"도시-교회\"로 만들기 위해 험난
한 전투에 들어갔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수많은 반동을 야기시켰고 더 나아가
1546년부터 기에르멩파의 우두머리인 페랭과 등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1548년
선거에서 페래의 지지자들이 승리하여 7년 동안 이들은 시의회 의석의 대다수를
점유하여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칼벵이 교회 치리에 대해 가졌던 매우 엄격한 개념이 많은 원한을 사게 했다
면, 복음 진리를 옹호하려는 그의 의지 역시 적지 않은 수의 적을 만들었다.
1543년 애가서의 정경성을 부인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문제시한 세바스티앙 카
스텔리용을 나무랐다. 8년 뒤, 예정론 교리를 부인하고 자기를 향해 하나님을 죄
의 조성자라고 비난한 제롬 볼섹의 공격과 맞서야 했다. 1533년에는 삼위일체 교
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처럼 그는 \"잘못된\" 교리
들을 쥬네브에서 제거한 뒤, 외부의 적과도 논쟁을 하였다.
쥬네브는 개혁파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럽에 광채를 던지는 영적
인 모국이었다.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