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배경과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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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도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거세게 번져 갔고, 성직자의 부패는 종교개혁의 소극적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과정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적극적 원인 중 하나는 패트릭 해밀턴의 루터주의에 입각한 설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1525년 루터의 저서를 스코틀랜드 내에 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므로 1528년경의 해밀턴이 이단으로 정죄한 후 앤드류성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해밀턴의 죽음에 스코틀랜드 국민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로 인해 개혁운동은 서서히 확대되어 갔다.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와 화형 속에서도 개혁 사상은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비튼 추기경의 죽음과 앤드류성의 함락은 친불파의 불안을 야기 시켰고, 1547년 프랑스는 이 기회에 개신교도를 멸절시키고 가톨릭을 복원하며, 정치적으로도 스코틀랜드에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개혁자들을 퇴진시켰다. 이 때 낙스는 프랑스군에 잡혀 노예가 된다. 승리한 프랑스와 친불파는 스코틀랜드에서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기독교는 가톨릭으로 복원되었다.
1557년 프랑스는 차기 여왕으로 내정된 메리를 프란시스 왕자와 결혼시켰으며, 이에 프랑스의 속국이 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져 민심이 불안해졌다. 친불파였던 귀족들도 이제 서서히 개혁주의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1559년 낙스의 귀국으로 영·불 전쟁이 일어났고 결과는 프로테스탄트의 승리였다. 이제 개혁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의회는 스코틀랜드 내에 가톨릭을 금지하는 법률을 공표하였으며, 교황은 스코틀랜드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미사도 금하게 되었다.
1561년 남편인 프랑스 왕 프란시스 2세가 죽은 후 귀국한 메리여왕은 프랑스 궁정에서 행하던 대로 가톨릭으로 회귀하고자 했고, 이에 낙스는 강력히 대처했다. 메리의 강압적 개신교정책은 결국 그녀가 영국으로 도망쳐야 될 만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메리가 영국으로 도피한 후 스코틀랜드는 항구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어 가장 성공적인 종교개혁국가가 되었다.
6.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
1) 원인
이 당시 프랑스의 교호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혁되지 않으면 안될 운명하에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하였고, 하급 성직자들은 무지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교회는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교회개혁을 열망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르페브르였다. 이상규, 「교회개혁사」(서울: 성광문화사, 1997), 273.
2) 내용
루터의 개혁이 시작된 지 2년 후인 1519년, 루터의 저작들은 프랑스로 유입되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암암리에 확신되고 있었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정죄되던 바로 그 해에 르페브르 도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르페브르는 1523년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출판하였다. 1526년에는 그가 번역한 구약성경이 출판되었다. 그의 성경번역은 프랑스에서의 교회개혁운동에 실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혁운동이 일어났을 때 프란소와 1세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종교 정책은 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처신을 했다. 그러나 1525년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탄압의 첫 대상자는 모의 주교였던 브리소네였다. 다음 목표는 르페브르였다. 르페브르의 신약성경본은 불태워졌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1525년 모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프란소와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앙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잔인한 박멸정책을 폈다. 앙리 2세 치하에서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프랑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앙리의 재위 중에 설립되었는데, 이 때가 1555년이었다. 교회가 설립된 곳에는 목회자들을 필요로 했고 제네바에서 1555년부터 1562년까지 적어도 90여 명의 목회자들을 파송하였다. 그리고 1558년 프랑스 개신교 최초의 교회회의가 파리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다. 개신교운동을 모질게 탄압하던 앙리 2세는 1559년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 이후 사망하였다.
그 후 프란소와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개혁교회는 계속 확장되어 갔고, 1562년 프랑스 전역에 2,150여 개 교회에 달했다. 왕이 죽고 케더린 드 메디치는 10살 난 아들의 섭정직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위그노들이 도시 밖에서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성 제르마인 칙령을 발표하였다. 기즈가는 이 칙령을 거부하고 두 달 후 분쟁과 대립, 그리고 전쟁의 시발이 된 직접적인 사건인 ‘바시 학살사건’이 1562년 발생한다. 1562년 첫 종교전쟁이 발발했고 휴전 후 1567년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런 전쟁은 8차례에 걸쳐서 계속 되었다.
왕이었던 샤를르 9세는 무능하여 그가 왕위에 있던 1574년까지 프랑스는 혼란한 때였다. 그가 죽고 왕위는 앙리 3세에게 이양되었고 피살당한 후 앙리 4세란 이름으로 즉위한 그는 위그노였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결국 그가 즉위한 지 9년후 1598년 위그노의 종교적 권리와 자유시민으로서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왕위가 내려오다 루이 14세에서 위그노 교회당이 불살라지고 학교는 패쇄되며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위그노들을 다시 박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고 이는 국가적 손실을 입긴 했지만 선한 씨앗을 뿌렸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참고서적
김명혁, 종교개혁의 배경과 준비, 크리스천투데이, 2006
칼 호이시, 세계 교회사, 한국신학연구소, 2004
전봉준, 교회사대사전, 기독지혜사, 1994
롤란드 베인튼, 16세기 종교개혁,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0
이상규. 「교회개혁사」서울: 성광문화사. 1997.
Clyde L. 맨슈렉/심창섭, 최은수譯. 「세계교회사」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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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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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89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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