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놀 <터닝 포인트> 요약_ 교회사, 기독교역사 교육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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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마크 놀 <터닝 포인트> 요약_ 교회사, 기독교역사 교육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01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독립된 자아를 찾다_ 예루살렘의 멸망(70년)
02 국가의 비호 아래 역사적인 교리를 만들다_ 니케아 공의회(325년)
03 기독론, 말씀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기틀이 마련되다_ 칼케돈 공의회(451년)
04 그리스도의 삶에 영감 받은 수도원_ 베네딕트 수도회칙(530년)
05 기독교제국,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_ 샤를마뉴의 대관식(800년)
06 로마 카톨릭과 정교회 돌아오기 힘든 강을 건너다_ 동서 교회의 대분열(1054년)
07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 십자가의 은혜의 신학_ 보름스 국회(1521년)
08 영적 갱신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_ 영국의 수장령(1534년)
09 가톨릭의 개혁으로 복음이 세계 선교로 이어지다_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예수회(1540년)
10 기독교의 영적 회복과 갱신, 그리고 부흥_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형제의 회심(1738년)
11 기독교제국은 가고 새로운 회복의 시대가 오다_ 프랑스 혁명(1789년)
12 선교의 폭발적 부흥이 일어난 위대한 시대_ 에딘버러선교대회(1910년)
13 한국 교회의 고난의 역사
14 한국 교회 교단의 분열

본문내용

1942년에 전필순 목사를 의장으로 하는 ‘조선 혁신 교단’을 성립시켰다. 일제는 모세 오경과 요한 계시록을 성경에서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모세오경이 지닌 민족주의적인 색채와 요한계시록의 재림사상이 문제가 되었다. 이어서 찬송가 변개 및 삭제가 이루어졌고, 뒤에 가서는 구약 성경 전체가, 심지어는 사복음서를 제외한 성경 전체가 부정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교회에 대한 일제의 박해는 1943년을 고비로 더욱 강화되었다. 공식 집회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 황성 요배, 출전 장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묵도, 황국 신민 서사의 제창 등이 강요되었다. 주일학교는 일요 수련회로 부흥회는 연성회로 개칭되면서 모든 종교 집회는 전시 체제화 되었다. 따라서 주일 오후 집회, 야간 집회, 수요 기도회는 일절 금지되었고, 교회당 안에서는 일본어 강습, 근로 작업이 강행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교회 내의 타락으로까지 이어졌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미소기바라이’(淸淨)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부정하고 서울의 지도자들은 한강에서 부산의 지도자들은 송도 앞바다에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교회의 비국가적인 옛 것을 씻는다는 의미에서 치러진 행위였다. 목회적인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 동료를 모함하거나 교회건물을 매매하는 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의 교회 말살 정책은 최종적인 단계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교단의 강제 통합과 이를 실행키 위해 1945년 8월경에 한국 교회의 지도자 다수를 살해할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8.15 해방이 되면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의 수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동족으로 인한 수난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였다. 한반도가 일제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38。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갈라지는 민족을 아픔을 겪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키고 남한에 와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독교 연감 1957년 판에 의하면 예배당 파괴가 장로교에서 152동, 감리교 84동, 성결교 27동 등이었고 순교자만도 장로교 150명, 감리교 48명, 성결교 11명, 구세군 7명 등이었다.
14 한국 교회 교단의 분열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에 유래가 없는 부흥을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출발부터 분열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각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선교지의 중복과 경쟁을 피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 정책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미국의 남, 북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감리교 등이었는데 이들은 ‘선교부 공의회’를 만들었고, 이 체제는 한 동안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단마다의 사상적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났다. 감리교는 하나의 교단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분열의 양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장로교는 달랐다. 호주 장로교가 들어와 부산과 경상도 일대를 주로 선교했는데 여기서 ‘고려파’(지금의 고신측)가 생겨났고, 또한 캐나다 장로교가 주로 선교한 함경도를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장로회가 생겨나게 된다. 예수교장로교는 주로 평안도를 주력 선교지로 정한 데서 일어났다.
선교지 분할 정책에 의해서 분열의 씨앗이 뿌려졌다면, 신사 참배문제는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해방이 되면서 한국 교회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신사 참배를 반대한 목회자들이 출옥을 하면서 신사 참배에 가담했던 목회자와 성도들을 ‘배교자’로 지목하고 나섰다.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진행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출옥성도들의 요구는 거셀 수 밖에 없었다.
신사 참배를 했던 일명 ‘배교자들’에 대한 처우의 문제로 의견이 갈라졌다. 복귀파였던 이기선 목사는 신사 참배를 한 목회자들이 회개하고 3-6개월간의 자숙한 뒤에 복직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재건파였던 김린희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현존 예배당을 파괴하고 예배당을 새롭게 세워야하며 신사참배한 자들과는 만일 가족이라면 이혼까지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부류였던 고신파는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등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고려 신학교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어떤 주장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신사 참배했던 자들에 대한 ‘회개와 자성’을 요구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당시 교권을 이미 쥐고 있었던 수구세력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사참배 문제가 난항을 겪으면서 결국 교단은 분열의 역사를 걷게 된다.
신사 참배 해결로 시작된 문제와 관련하여 출옥 성도와 경남 노회는 고려파 신학교 문제를 더하면서 고려파가 분리해서 생겨나게 된다. 이 고려파는 현재 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캐나다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은 함경도 중심의 목회자들이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들게 되면서 기독교장로회가 분립하게 된다. 1952년 대구 총회에서 성경 오류설을 주장한 김재준 목사를 면직시키면서 본격적인 분리가 진행된다. 1953년 서울 한국 신학대학 강당에서 김세열 목사의 사회로 새로운 기독교장로회가 설립되었다.
분립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1948년 암스텔담에서 모인 W.C.C 대회에 김관식 목사가 참석하고 귀국 보고를 가진 뒤 교회 일치 운동에 동참하기로 하고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 1954년에는 김현정 목사와 명신홍 목사를 대표로 파송하기도 했으나 W.C.C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 아래 있다는 판단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생겨나게 된다. 1956년에 100여명이 연서한 W.C.C 탈퇴안이 상정되어 탈퇴 찬반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1959년 대전에서 열린 예장 제44회 총회에서 계속해서 찬반 세력 간의 충돌이 심각해지므로 정회가 선언되었다. 이후에 W.C.C 탈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울 연동 교회당(현동측)에 모여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장신대학)로 분립하게 된다. 반면, 11월까지의 정회에 따라 서울 승동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총회장 노진현목사의 사회로 총회를 속개하니 이것이 세칭 승동측으로 그 뒤 합동 총회(총신대학)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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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3.02.01
  • 저작시기20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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