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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영웅, 뛰어난 작전장교라는 명성을 업고 미국 내에서 정계나 재계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지만 남은 삶을 사회봉사 활동에 일생을 바쳤다.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 전투에서 만일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칠 것이라고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한 것이다. 봉사활동은 여성, 아동, 청소년, 노인, 장애인, 빈민, 소수계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권익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맞춰졌다.
재미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으로는 한인건강전보센터를 설립해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이민 1세대와 노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장애인이나 병약자들에게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청소년회관은 재미동포 2세 청소년들을 위한 기구로 현재는 다른 인종의 청소년도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봉사활동은 재미 한인사회에 한정하지 않고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한 봉사도 했는데 이는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아 일본계를 포함해 소수계의 권익을 옹호한 것이다.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해 재미일본계의 이민박물관인 일미박물관 이사로 박물관의 건립과 발전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봉사활동보다도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를 챙기는 사례에서 볼 때도 부대에서 직접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은 안되기 때문에 고아원에 데려다 주고 양육비를 지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고아원도 일일이 현장답사까지 하면서 후보를 정한 후 감리교 목사가 관리하는 경청애인사로 정해 보내주었는데 이미 192명이나 수용돼 있어 식사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직접적인 지원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알고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가족들에 편지를 써서 교회조직을 통해 재정지원을 호소하기도 하고 부대 내 보급되는 술의 양을 줄여 경천애인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쟁고아를 불쌍해서 일시적으로 또는 금전적으로 도와주면서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시각과 함께 어려운 사람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사람과 연결해주고 그런 사람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을 보면 박애주의자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군인으로서 김영옥은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을 잘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는데 단순하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전선에서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성과를 달성하는 지장과 용장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김영옥은 제대를 한 이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재입대를 하고 한국에 와서도 통역장교나 정보장교가 아닌 전선에 앞장서는 지휘관을 자청하였고 이러한 모습들이 군대 내에서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전쟁영웅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역 후에는 전쟁영웅에서 사회적 약자를 지원해주고 돌보며 남은 생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국가나 인종을 뛰어넘어 진정한 아름다운 영웅으로 추앙받을만한 인물로 보인다.
재미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으로는 한인건강전보센터를 설립해 미국의 사회보장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이민 1세대와 노인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장애인이나 병약자들에게 재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청소년회관은 재미동포 2세 청소년들을 위한 기구로 현재는 다른 인종의 청소년도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봉사활동은 재미 한인사회에 한정하지 않고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한 봉사도 했는데 이는 일본계 미군 장병 2차대전 참전용사회 회장을 맡아 일본계를 포함해 소수계의 권익을 옹호한 것이다.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해 재미일본계의 이민박물관인 일미박물관 이사로 박물관의 건립과 발전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봉사활동보다도 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를 챙기는 사례에서 볼 때도 부대에서 직접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은 안되기 때문에 고아원에 데려다 주고 양육비를 지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고아원도 일일이 현장답사까지 하면서 후보를 정한 후 감리교 목사가 관리하는 경청애인사로 정해 보내주었는데 이미 192명이나 수용돼 있어 식사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직접적인 지원에는 한계가 있는 것을 알고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미국 가족들에 편지를 써서 교회조직을 통해 재정지원을 호소하기도 하고 부대 내 보급되는 술의 양을 줄여 경천애인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대안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전쟁고아를 불쌍해서 일시적으로 또는 금전적으로 도와주면서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시각과 함께 어려운 사람을 더 잘 돌볼 수 있는 사람과 연결해주고 그런 사람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을 보면 박애주의자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군인으로서 김영옥은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을 잘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는데 단순하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전선에서 희생정신을 발휘하고 성과를 달성하는 지장과 용장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김영옥은 제대를 한 이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서 재입대를 하고 한국에 와서도 통역장교나 정보장교가 아닌 전선에 앞장서는 지휘관을 자청하였고 이러한 모습들이 군대 내에서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전쟁영웅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역 후에는 전쟁영웅에서 사회적 약자를 지원해주고 돌보며 남은 생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국가나 인종을 뛰어넘어 진정한 아름다운 영웅으로 추앙받을만한 인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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