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기
2. 암행어사 박문수
3. 푸른 눈에 비친 조선
4. 돌아온 의궤와 끝나지 않은 전쟁
5. 감옥에서 꽃이 핀다.
6. 애국가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7. 과거와 수능 비교
8. 군함도, 지옥섬
9. 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10. 의의 및 평가
2. 암행어사 박문수
3. 푸른 눈에 비친 조선
4. 돌아온 의궤와 끝나지 않은 전쟁
5. 감옥에서 꽃이 핀다.
6. 애국가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7. 과거와 수능 비교
8. 군함도, 지옥섬
9. 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10. 의의 및 평가
본문내용
가운데 1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 극도의 정확성이 요구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채점은 채점단이 답안지를 인수하고, 이를 개봉한 다음 이미지스캐너를 이용하여 판독을 끝낸 답안지를 주전산기로 넘겨 진행한다. 이 작업은 자료확인·성적처리 및 확인·성적통지표 출력의 순으로 약 1개월 동안 진행된다. 교육부가 발표한 기본계획에 따르면, 2017학년도 시험부터 국어의 수준별 시험이 폐지되며 수학은 문·이과를 구분하여 나·가형 시험으로 치러진다. 또한 사회탐구의 선택과목으로 있던 한국사 과목이 모든 수험생이 응시해야 하는 필수 과목(20문항, 시험시간 30분)으로 독립·신설된다. 2018학년도 시험은 영어를 제외한 모든 영역이 2017학년도 시험과 같으며, 영어 과목에는 절대평가(9등급, 등급 간 점수차 10점)가 도입된다.
군함도, 지옥섬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섬의 모양이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軍艦島)’라고 불리며 일본어로는 ‘하시마(端島)’라고 한다.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이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이곳을 개발, 탄광 사업을 실시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1950~60년대 일본 석탄 업계가 침체되어 1974년 폐광된 후 무인도로 남아 있다. 군함도는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당한 곳이기도 하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端島)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약 500~800여 명의 조선인이 이곳에 징용되어 강제 노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 불린 군함도는 가스 폭발 사고에 노출되었으며 공간이 좁아 노동자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처럼 노동 환경이 열악한 해저 탄광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일일 12시간 동안 채굴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탄광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으며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7월 5일(현지 시간) 독일 본 월드컨퍼런스센터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의에서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탄광’이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됐다. 그러나 이 유산에는 조선인 5만 7,900여 명이 강제 동원된 바 있는 하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등 7개 시설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1919년 평양 숭의학교(崇義學校) 재학시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3주일 동안 구류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김정직(金鼎稷)·김순일(金淳一)·김재덕(金在德)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공채를 판매,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하다 다시 붙잡혀, 이른바 제령위반(制令違反)이란 죄목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비밀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 그 해 목선을 타고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뒤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윈난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校)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25년 졸업하여 중국군 펑위샹(馮玉祥) 휘하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복무하였다. 이후 1927년장개석(蔣介石)이 북벌(北伐)할 때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가담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1928년 5월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김순애(金淳愛)·방순이(方順伊)·최선엽(崔善燁)·최애림(崔愛林)·최형록(崔亨祿) 등과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으며,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다 광복 후 1949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의의 및 평가
학생들이 역사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논리적이었으며. 또한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생들의 관심이 학업과 진로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교사들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군함도, 지옥섬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섬의 모양이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軍艦島)’라고 불리며 일본어로는 ‘하시마(端島)’라고 한다.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이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 이곳을 개발, 탄광 사업을 실시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1950~60년대 일본 석탄 업계가 침체되어 1974년 폐광된 후 무인도로 남아 있다. 군함도는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당한 곳이기도 하다.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의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端島) 탄광 강제 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 실태 기초 조사>(2012)에 따르면 1943년에서 1945년 사이 약 500~800여 명의 조선인이 이곳에 징용되어 강제 노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 불린 군함도는 가스 폭발 사고에 노출되었으며 공간이 좁아 노동자가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곳이었다. 이처럼 노동 환경이 열악한 해저 탄광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은 일일 12시간 동안 채굴 작업에 동원되었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탄광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했으며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지난 2015년 7월 5일(현지 시간) 독일 본 월드컨퍼런스센터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의에서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탄광’이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됐다. 그러나 이 유산에는 조선인 5만 7,900여 명이 강제 동원된 바 있는 하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등 7개 시설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돌아온 이름들(여성독립운동가)
1919년 평양 숭의학교(崇義學校) 재학시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붙잡혀 3주일 동안 구류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인 임득삼(林得三)·김정직(金鼎稷)·김순일(金淳一)·김재덕(金在德)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공채를 판매,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 활동을 계속하다 다시 붙잡혀, 이른바 제령위반(制令違反)이란 죄목으로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단을 조직,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을 하고 비밀공작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 그 해 목선을 타고 상해(上海)로 탈출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뒤 이승만(李承晩)·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3년 윈난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校)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25년 졸업하여 중국군 펑위샹(馮玉祥) 휘하의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복무하였다. 이후 1927년장개석(蔣介石)이 북벌(北伐)할 때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에 최용덕(崔用德)과 함께 가담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1928년 5월난징(南京)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重慶)에 있는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김순애(金淳愛)·방순이(方順伊)·최선엽(崔善燁)·최애림(崔愛林)·최형록(崔亨祿) 등과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으며, 사교부장으로 활동하다 광복 후 1949년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의의 및 평가
학생들이 역사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논리적이었으며. 또한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생들의 관심이 학업과 진로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교사들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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