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보성·장흥 개관
재필선생 기념공원
Ⅲ. 대원사(大原寺)
Ⅳ. 장흥 보림사
Ⅴ. 보성 차밭
Ⅵ. 벌교 홍교
재필선생 기념공원
Ⅲ. 대원사(大原寺)
Ⅳ. 장흥 보림사
Ⅴ. 보성 차밭
Ⅵ. 벌교 홍교
본문내용
대부분의 땅이 바로 백제였고 자연스럽게 자생차가 그 생명의 뿌리를 깊숙이 박고 있으면서 활발한 차 문화를 꽃피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일본 ‘동대사요록´에 나오는 행기 스님의 존재다. 행기 스님이 일본에 차를 전래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백제의 지도층과 스님들이 7세기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구산선문을 통한 남종선과 차의 유입을 통해 신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을 시작한다.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최고의 문화로 꼽혔던 차문화를 보급 확산시키기 위해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지리산이라는 차의 최적지에 차나무를 생산 보급할 것을 명령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왕, 승려,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백성까지 차를 마셨다는 다양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차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바치던 마을인 ‘다소마을(茶所村)´, 귀족들이 차를 마시며 즐겼던 강릉의 한송정, 휴대용 다구(茶具)를 지고 차공양을 가다 경덕왕과 만난 충담 스님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 당시 차 문화가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원효 스님의 차방(茶房)이었던 ‘원효방’의 존재는 그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규보는 ‘남행월일기´에서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2.4m크기의 ‘원효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4m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 스님의 초상화, 외실에는 병 하나, 찻잔과 불경을 놓는 책상만 존재하는 매우 작은 차방이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에도 다채로운 형태의 다방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차의 전성기는 이어진다. 당시 차는 치국(治國)의 도구로 사용됐다. 망국의 한을 달래고 있는 신라귀족들과 승려들에게 통치자의 ‘격려금’으로 차를 하사했다. 또한 차를 준비하고 베푸는 의례를 담당하는 관청인 다방과 다원이 존재했다. 다방은 다방시랑(정3품)에서부터 다방별감까지 있었고 직급에 따라 모자, 옷, 허리띠 등이 달랐다. 각 지역의 중심부에 존재하며 아름다운 정원과 정자를 소유해 차를 마실 수 있었던 다원은 경북다방원, 경남다견원, 황해다정원, 충남 · 경북다정원 등이 있었다. 고려 때는 또 궁중 밖에서 왕족에게 차를 올리거나 준비하는 일을 위해 다구와 그에 필요한 짐을 담당했던 다군사(茶軍士)가 존재했고 차를 통해 부를 축적했던 차 상인까지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명전(茗錢) 즉 투다(鬪茶:차의 맛을 겨루는 것)를 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행다(行茶)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새로운 왕조의 차 문화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소박한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수없이 밀려드는 전란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차문화를 주도했던 사찰의 급격한 몰락은 조선시대 차산지의 폐쇄를 불러왔고 차문화를 소박한 형태로 변형시킨다. 과중한 차세와 차 공납의 심화는 어려운 백성들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다.세차(稅茶)를 내기 위해 15세기에는 차 한홉과 쌀 한말,17세기에는 차 한말과 무명 30필을 바꾸었을 정도로 차의 폐해는 심각해졌다. 김종직은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관청용 차밭을 일구고 차 공납을 자체적으로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음다풍속이 존재했다. 궁궐이나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차를 주관하는 다방, 관청에서 제대로된 판결이나 회의를 하기 위한 다시(茶時:차 마시는 시간)가 있었다.그중 ‘야다시’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기도 하다. 야다시(夜茶時)는 밤중에 관리들이 다시를 갖는 것으로 파렴치한 치부나 도덕적 패륜을 저지른 관리들을 골라 그 죄상을 흰 널빤지에 써서 그 집 문위에 걸고 가시나무로 문을 봉한 뒤 서명을 하고 돌아갔다. 야다시를 받게 된 사람은 그집에 평생 유폐되어 다시는 세상출입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 안방극장에 등장했던 ‘다모(茶母)´는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했다.그러나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로 변질되기도 했다. 아직도 한국 차 문화사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거의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차는 군자와 같아서 품성에 삿됨이 없다.”는 말이 있다. 차가 역사속에서 다양한 편린에도 불구하고 당시대의 정신적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온 고고한 정신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어둡고 후미진 곳에도 우리생은 늘 피어나듯 하얀 황금의 꽃술을 머금은 차꽃도 찬바람과 눈을 맞으며 여기저기 가없이 피어난다. 수없는 역사의 핍박과 수탈 속에서도 느껴지는 차의 힘이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에 배워야 할 차의 또 다른 모습이다.
2. 차의 종류
3. 보성 차밭
4. 녹차 마시는 순서
Ⅵ. 벌교 홍교 : 보물 제304호
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말하며, 아치교·홍예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현재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강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 속에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며, 웅대함과 함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2. 차의 종류
3. 보성 차밭
4. 녹차 마시는 순서
Ⅵ. 벌교 홍교 : 보물 제304호
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말하며, 아치교·홍예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현재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강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 속에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며, 웅대함과 함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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